데미안x알리샤 / 메이플스토리 / 소설, 상플

[데미알리] 아프게 피어난, 03


"오늘은 형을 보고 왔어."

"..."

"형은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걸 몰랐으면 좋겠는데.."

어둠 속 빛이라곤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 뿐인 그 곳에서, 데미안의 낮은 음성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모든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

"..."

"내게 얼마의 시간이 남은거지? 꼭 해야할 일이 있는데."

"너가 뭘 해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멈춰."

"뭐?"

"지금 잠깐이라도 멈췄다 가라구. 안 그러면..."


알리샤는 입술을 꾹 깨물며 뒷말을 흐렸다. 데미안은 그런 알리샤의 반응을 보고도 데미안은 꿋꿋히 정면을 쳐다볼 뿐이었다.


"또 그 소리 할거면 그만 둬. 넌 이해 못 해. 내가 이렇게 까지 하는 이유."

"마기에 먹히고 생명력을 빼앗기며까지?"

"나도 내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아."

"그럼 답 또한 누구보다 잘 알겠네. 너를 볼 때마다 약해지는게 난 느껴지는데, 계속 지금처럼 행동하겠다고?"

"난 매일 강해져. 그 부작용으로 살짝 아픈 것 뿐이지."

"내가 약해진다는건 그런 힘을 말하는게 아닌걸 너도 알텐데. 진짜 파멸한다는게 뭔 소린지 몰라? 아직도 그게 멋있다고 생각해?"

"나도 그런 엔딩은 원치 않아. 살고 싶다고."

"..."

"근데 살고 싶은 욕심을 짓누를만큼, 내가 지은 죄가 있고, 해야할 일이 있어."

"하지만 지금처럼은 아니야."


"아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할 게 없어. 다 내가 자초했고 책임을 져야하는 것. 그 뿐이야."

데미안은 더 이상의 간섭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손 깍지를 풀어 팔짱을 끼곤, 다리를 교차로 둔 뒤 눈을 감았다.

알리샤는 그런 데미안을 보더니, 반대로 돌아 누웠다.




..왜 그랬어 대체? 어떻게 너가..

..아니야... 형.. 그게 아니야!

온통 시커멓게 타버린 가운데, 데미안의 뒤에선 커다란 화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몸을 불려가고 있었다.

그런 데미안의 앞엔 차가운 표정으로 데미안을 마주하고 있는 데몬의 모습이 보였다.

입술을 꽉 깨물고, 한 손에 든 육중한 무기를 부들부들 떨며 데미안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증오와 경멸이 섞인 냉랭한 기운이 가득 담겨있을 뿐이었다.


..널 용서하지 않을거야.. 용서할 수 없어..

..일부러 그런게 아니야! 아니라고! 미안해..

폐 속까지 뜨겁게 끓어오르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데미안은 형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몸을 타고 오르는 마기가 곧 형체를 이루더니 타들어가는 듯한 시커먼 손이 데미안의 얼굴 위로 불쑥 올라왔다.


..또 날 죽일거니? 데미안?

..잘못했어요, 엄마. 아니에요! 아니에요!

눈 앞을 휘적이던 검은 손이 불쑥 데미안의 얼굴을 덮쳤다.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진 데미안이 전신을 떨며 땅바닥을 굴렀다.

형은 무심하게 그런 데미안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고, 데미안의 등 뒤에서 춤을 추던 화염은 뱀이 입을 벌리는 모양새로 데미안을 덮칠 듯 높이 솟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불자 커다란 화염이 프스스- 소리를 내며 꺼졌고, 온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곧 온 몸을 감싸던 마기가 사라지고, 시커먼 손이 사라지고, 눈 앞의 형이 사라졌다.


..형? 형? 엄마아!!!!


매번 반복되는 꿈이었다. 꿈 속에서 죽어라 도망쳐도, 손발이 닳도록 빌어도 늘 같은 꿈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꿈은 뭔가 달랐다.




"무슨 꿈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꿔? 이 땀 좀 봐."

알리샤가 양 손으로 데미안의 얼굴에 손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

"너 때문에 내가 다 깼어!"


아직도 천장의 구멍에선 어둑한 바탕에 별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래 잔 것도 아니겠지.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마음 편히 오래도록 자 본 적이 없었으니까.

꿈 때문에, 늘 밖에선 눈을 비비며 잠을 참았고, 항상 정해둔 몇몇 아무도 없는 은신처에서만 짧은 잠을 청했었으니까.


"물이라도 마셔."

알리샤가 양손을 모아선, 넓은 나무 이파리에 가득 찬 이슬을 내밀었다. 데미안이 이마를 짚으며 중심을 잡고 앉았다.

데미안이 곧장 이파리를 받지 않자 알리샤가 한 번 더 권했다.


"먹고 정신차리라고."

"찬 거 말고, 미지근한 걸로."

"아이, 진짜 요구조건도 많네."


알리샤가 뒤를 돌아 앉아 나뭇잎 속을 뒤적거렸다. 그런 알리샤의 등에 의자에 기대듯 상체를 기대는 데미안이다.

"야, 무거워. 나 의자 아니거든?"

"받칠만한 등받이가 없어서. 물은 필요없고, 그냥 그대로 있어봐."


알리샤가 하던 일을 멈추고 데미안의 말을 따랐다. 알리샤도 자신의 무게중심을 데미안 쪽으로 보내면서 편하게 기댔다.

서로의 등받이가 되어, 둘은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꿈에서 깨고도 뒤숭숭 한 듯,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던 데미안이, 차분히 손을 내려놓곤 말했다. 

"가끔은 이렇게 아무 생각도 안하고.. 편하게 기댈 수 있었으면 좋겠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의자가 아니야."

알리샤는 잠이 오는 듯, 아함- 하고 하품을 하곤 잠잠해졌다.


"근데 너.. 나한테 봉인 다시 안 걸어뒀더라? 내가 나무를 이렇게 까지 키우는데도..."

"네가 힘을 회복했는지 안 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그랬지."

"뭐라고?"

"일부러 나 방심하도록 빈둥거리면 곤란하잖아? 아직까지 너 회복되려면 멀어보이던데, 설마 너 이 나무 하나 키웠다고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봉인도 풀렸고, 힘도 꽤 회복됐으니까 내가 그냥 도망가면 어쩔껀데?"

"그럼 내가 어떻게 나올지 넌 잘 알잖아."

"음, 안봐도 뻔하지. 죽이고, 불태우고."

"그니까 넌 피해를 안 주려고 도망가려는 생각은 안 하게 될거라는 말씀."

"만약 내가 아무도 피해 받지 않고, 아무도 피해 줄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간다면?"

"글쎄. 설령 그런 곳이 있다고해도 넌 도망 안 갈껄?"

"무슨 수로 그렇게 자신해?"

"떠날 사람은, '이렇게' 굴지 않아."

"..."

"자기를 잡고있는 사람의 건강을 그렇게 신경쓰는 인질이 어딨어?"

"뭐. 그럴 수도 있는거지.."


"난 봤거든. 그 때."

"뭘?"

"그렇게 온 몸이 아파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도 내 손을 잡고 있던 너의 눈빛에서.. 진실을.. 봤거든."

"...."

"그리고 가려면 나 자고 있을 때 진작에 갔겠지."

"너 나간 새에 갈려고 했을 수도 있지않겠어? 너가 잠귀가 밝을 수도 있으니까?"

알리샤의 대답에 데미안이 피식 웃어보였다. 그런 데미안을 따라 알리샤도 웃었다.


"그래도 난... 너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

"힘을 회복하고도, 내 부탁을 들어주고도.." 

"..."

"그냥 지금처럼 있었으면 좋겠어. "




데미안의 인질을 향한 묘한 부탁에 알리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레 다른 화제를 입에 올렸다.


"내가 이해 못 할, 너가 그렇게 까지 해야하는 이유. 너희 가족과 관련있는거야?"

"뭐?"

"형이고, 엄마고.. 뭘 그렇게 격렬하게 아니라고 하는지. 뭐가 또 그리도 미안한지."

"너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보이지 않은 것까지 안다고 몇 마디 보탤 생각인가 본데, 넌 거기에 대해서라면 신경꺼."

"신경쓰게 만든게 누군데? 남의 잠 다 깨게 만들고, 궁금하게 만든게 누군데 그래?"

"..."


데미안이 낭패어린 표정을 짓더니, 벌떡 일어났다. 데미안의 등에 기대고 있던 알리샤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야! 너 진짜."


데미안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나무 아래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알리샤가 엉망이 된 머리를 정돈하며, 원래대로 앉았다.


"벌써 가게? 알았어. 안 물어보면 되잖아."

"아니, 너랑 있으면 뭔가 내 속내를 다 읽히는 느낌이야. 내가 나도 모르게 터놓고 있고. 처음부터 여기에서 잠드는게 아니였어."

"..."

"너랑 말하면, 내가 내 비밀을 하나씩 주는거 같잖아. 이 세계에서 비밀을 들킨다는건, 약점을 하나씩 쥐어주는거야. 안 그래?"

"비밀을 들키는게 아니라 털어놓는거면, 마음의 짐을 하나씩 덜게되는거지."

"이렇게 오랜만에 터놓고 말할 수 있는건 참 고마운데, 더는 안 돼."


데미안의 모습이 나무 아래로 사라지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인질 관리를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딨어! 나 진짜 도망간다?"


알리샤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메아리쳤다.

"여기 혼자 있으면 심심하단 말이야!!"








"급했나보군. 평소에 잘 쓰지도 않던 마법진을 다 이용하고."

아카이럼이 입에 비웃음을 머금고는 데미안에게 말을 걸었다. 늘 소름끼치는 뱀을 데리고다니며, 스태프를 들고는 기분나쁜 웃음을 지어보이는 아카이럼을 볼 때 마다 데미안은 이유없이 기분이 나빴다. 데미안은 자신이 활동함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아카이럼을 늘 성가시게 여기는 참이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그 성가신 군단장은 데미안의 신경을 거스르는 참이다.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까지 너무 관심이 많은거 아니야?"

"마법진을 같이 쓰신 그 분은.. 너가 데리고 있다는 그 초월자인가?"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는걸? 난 다 알려준 적이 없는데 말이지."


데미안이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치고는, 팔짱을 낀 후 벽에 무심하게 기댔다.

"오늘은 내가 뭘 하면 되는거지?"

"혹시 이 약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아카이럼이 데미안의 물음과는 관련없어보이는 약 두 알이 든 투명한 원기둥 통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당신이 나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겠지만, 난 그 쪽에 도통 관심이 없는데. 그 쪽이 무슨 약을 챙겨 먹는지까지 내가 알 필요가 있겠어?"

"허허, 아닐세. 이제 자네는 나보다 더 능력있다고 생각할테니, 날 한참 발 밑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직까진 멀쩡하다네. 단지 갖게 된 힘을 잘 다룰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선배 군단장의 작은 조언이랄까."

"그래서 그걸 나에게 준다고? 내가 힘을 다루든 초월자를 다루든 그 쪽에서 상관할 바가 아니야."

"윌이 제로를 관리할 때 사용했던 약이라고 하더군. 아마 이 약이라면 네 힘에 부치는 초월자를 통제하기 더 쉬워질꺼야."

"난 그런 것 없어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어."


"그래도 초월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존재지. 혹시 모르니 받아두는게 낫지 않겠나?"

"자신이 스스로의 힘에 자신이 없으니 상대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난 당신과는 달라. 약해빠진 윌과도 다르지. 난 윌이나 당신보다 훨씬 강해. 그래도 안달해하는 모습이 보기 안타까우니, 받아두도록 하지."

데미안은 아카이럼의 쓸데없는 걱정에 비웃음으로 응대하며,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약을 받아선 주머니 속에 넣었다.


"나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내 힘으로도 초월자 하나 쯤은 잘 통제할 수 있다는걸 잘 봐두라고. 검은 마법사가 왜 우리 둘의 신뢰의 무게를 다르게 다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배우도록."




오늘은 특별한 명이 없다며, 아카이럼은 약만을 쥐어주고는 데미안을 돌려보냈다. 데미안은 무어라 말을 하려던 것을 참고, 그냥 그 곳을 빠져나왔다.

"참 귀찮은 인간이군.. 이깟 약 하나 때문에 사람을 오라가라 하다니."


어차피 성의를 보이는 차원에서 받은 약이기에, 걸을때마다 딸깍이는게 꽤 성가신 참이다. 귀찮은 존재는 쓸데없이 주머니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한 손으로 대충 훑어서 찾아낸 약통을 바닥에 버리기 전, 잠시 구경하는 데미안이다.


평범하게 생긴 약통과 딱히 특별할 것 없는 회색 알약.


"이걸로 제로를 관리했다고?"


윌이야 지략을 무기삼아 명을 받드는 자이니, 초월자를 관리하기엔 당연히 힘에 부쳤을 것이다. 무언가를 다루는 건 머리로만 할 수가 없을테니까. 그래서 이런 귀찮은 것까지 감수해야했겠지.

그렇지만 난 달라. 이런 것 없어도 초월자 하나 간수하는건 어렵지 않다고.




하지만 스스로의 힘을 자신하는 와중에도 잠깐씩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알리샤가 키워낸 큰 나무. 칙칙한 어둠으로만 가득했던 곳을 푸르게 채워준 그 나무..

그리고 알리샤의 한 마디.

"만약 내가 아무도 피해 받지 않고, 아무도 피해 줄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간다면?"


도망이라.. 그녀는 처음 잡혔을때부터 몇 번이고 '도망'이란 단어를 말해왔었다. 도망칠 의지와 어느 정도 회복된 힘.

이걸 아카이럼이 예상했던 건가? 데미안의 얼굴에 고뇌의 빛이 어렸다.



데미안이 은신처로 돌아왔을 때, 알리샤는 나무 꼭대기가 아닌 땅위로 두껍게 올라온 줄기와 뿌리의 경계 골에 앉아서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 알리샤 주변으로 피어난 노란 아우라를 타고 꽃잎이 산들거리며 날리고 있었다.


"거기 여신님?"

"음.. 네? 어, 왔어?"

"여기 아침 식사."

"아, 잠깐만. 여기만 다 읽고."


데미안이 원목탁자에 음식을 올려놓았다. 그 음식 보따리 속에서 약통이 삐져나왔다. 데미안의 손이 통을 집을 듯, 말 듯 허공에서 주춤거렸다.

결국 이 약을 먹었다는 제로도 아직까지 아무탈 없이, 거울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윌만큼 약하지 않으니, 두 알이 아닌 한 알만 넣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데미안이 조용히 약통을 집더니, 알리샤가 먹을 음료에 약 한 알을 퐁, 하고 떨어뜨렸다.



알리샤는 읽던 책에 나뭇잎을 꼽고는, 탁자로 다가왔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알리샤는 데미안이 가져온 음식을 들고는 다시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주머니 속 약통을 꽉 쥐고 있는 데미안은, 그런 알리샤의 모습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이거 맛 없는거야? 왜 자꾸 흘끔거리면서 눈치를 봐?"

"내가 뭘?"

"안 굶으니까, 그냥 니 볼 일 보세요. 잡초씨."


알리샤의 손이 음료수 병에 닿았다. 아무 주저함 없이, 알리샤가 음료수를 마셨다. 그리고 아무런 이상 없이, 병을 내려놓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냥 초월자들의 힘을 제어하기위한 작은 약일 뿐이었다.




  

"뭔가 이상해.."

알리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알리샤가 얼굴을 찡그리자, 뒤의 큰 아름드리 나무가 급격히 시들기 시작했다.

살랑거리며 불던 나뭇잎들이 바람에 서로 부딪혀 푸석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식은 땀으로 젖은 알리샤가 자신의 속을 부여잡곤 옆으로 꼬꾸라졌다.


"알리샤! 알리샤!"

데미안이 그런 알리샤를 향해 뛰어왔다. 숨을 헐떡이던 알리샤의 눈이 감기더니, 이내 움직임이 멈췄다.


"죽.. 죽으면 안돼."

알리샤의 어깨에 데미안이 손을 올렸다. 방금까지 멀쩡히 대화도 나눴는데, 순식간에 그런 상대가 힘없이 쓰러져버렸다.

그런 알리샤의 상태를 확인하던 데미안의 온 몸을, 마기가 휘감기 시작했다.


"안돼. 정신.. 차려.."

데미안은 자신을 휘감은 마기의 고통 속에서도 알리샤를 붙잡곤 흔들었다.

"일어나.. 정신 차리라고!"


아무 미동도 없이 쓰러진 알리샤 옆에, 데미안은 마기로 몸부림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익숙해질만도 한데, 고통은 늘 참을 수 없이 온 몸을 찔러왔다.


그 고통 속에서도, 데미안은 알리샤의 이름을 불렀다. 상대가 들을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부르는 이름같기도 했다.





정신을 잃을만큼 발작을 앓았던 모양이다. 이제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고있었다. 스스로의 정신을 가다듬다가, 알리샤의 이름을 부르며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눈 앞에 쓰러져있는 알리샤를 보니 정신이 훅, 돌아왔다.

시들어버린 잎 사이로 천장의 구멍으로 들어온 빛이 쏟아지고 있음을 발견한 데미안이 서둘러 알리샤를 들어올려선 나무 맨 위로 올라가 눕혔다.

햇볕이 알리샤의 주변에 원모양을 이루며 쏟아졌다.



자신의 주머니 사이로 삐져나온 약통을 서둘러 쥐고는, 남은 한 알을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조심스레 집어 약을 입에 넣고는, 중간을 물어 조각을 냈다.

부정한 기운!

입에 문 조각을 퉤, 하고 뱉어내곤 데미안은 혼란에 빠졌다.

조각난 약에서 피식거리며 빠져나온 기운에 반응이라도 하 듯, 알리샤의 몸 주변에서 같은 기운이 흘러나와선 둘의 주위를 감쌌다.


"그 교활한 늙은이가 날 감히.."

데미안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데미안이 손을 뻗어서 둘을 감싸고 있던 기운을 흡수했다. 손을 덜덜 떨며 주변의 기운을 다 정리하고도, 알리샤의 이마에 반대 손을 대고는, 알리샤가 마셔버린 부정한 기운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흡수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또 찾아온 마기의 고통으로, 데미안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성큼성큼 넓은 발걸음으로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그림자의 양 손엔 칼과 빈 약병이 들려있었다.

그림자는 뒤를 돌아보고있던 아카이럼에게 칼을 겨누고는, 그 앞으로 약병을 던졌다.


빈 약병이 떼구구 굴러 아카이럼의 발 앞을 막아섰던 벽에 부딪혀 깨졌다.



"이런, 이렇게 치졸한 방법은 재미가 없는데. 안 그래, 늙은 양반?"

"스스로의 힘을 믿지 못 하고 약을 먹인 너가 나에게 할 소린 아니지 않겠나?"

"그럼 우리 둘은 똑같은 셈이군. 스스로의 힘을 믿지 못한 것. 안 그래?"

"난 한 번도 나의 힘을 믿지 않은 적이 없지. 그게 너와 나의 차이가 아니겠나? 없던 힘을 갖게되니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데미안 니 스스로를 잘 생각해보거라."

"내 능력이 못마땅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그르치려 했다는 이야기는 죽어도 하지 않겠지."


"아니, 오히려 더 도와주려했다면, 믿겠는가?"

"헛소리마." 데미안이 비웃었다.

"내가 줬던 약이 무서운게 뭔 줄 아나? 부정한 기운을 응축해 놓은 약이라, 한 알로 빈사상태에 이르러 봉인해버릴 수 있고, 두 알만으로도 부정한 기운이 가득차 소멸시켜버릴 수도 있지. 우리 같은 존재보다 대단한게 초월자겠지만, 부정하지 않던 초월자가 부정한 존재가 되버리는 순간, 부정한 자는 초월자가 될 수 없어 소멸해버린다는 사실이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


데미안의 머리 속에 작은 희망이 뇌리를 스쳤다. 알리샤는 두 알을 먹지 않았다.. 잘만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도와준 셈이지. 자네가 통제할 수 없는 생명의 초월자를 대신 소멸시켜주고, 그런 초월자대신 데미안 자네가 쉽게 주무를 수 있는 새 초월자를 세울 기회를 내가 준 것이니. 허허허."

"..."

"하지만 자네가 원하는 생명의 초월자를 세우는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니 빨리 어미를 살리고 싶다면, 생명의 초월자의 일로 벌여놓은 개인 행동은 잠시 접어두고, 나와 함께 새로운 시간의 초월자를 맞을 준비를 하는게 좋을걸세."

데미안은 아카이럼을 겨눈 칼을 내려놓고는, 서둘러 은신처로 향했다.




알리샤가 의식을 잃은 것은 단지 부정한 기운 뿐이었다. 아카이럼을 만나기 전, 부정한 기운이 아닌 또 다른 이유로 의식을 잃었을까봐 노심초사 했던 터였다.

부정한 기운 하나로 일어난 일이었다면, 어쩌면 일의 해결은 더욱 쉬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천장 구멍으로 볕이 쏟아져내려, 알리샤의 주변을 동그랗게 비췄다.


볕과 어둠의 둥근 경계 한 쪽이 조심스러운 그림자에 의해 허물어졌다.

경계를 허물었던 그림자는 무릎걸음으로 알리샤의 곁에 바짝 다가섰고, 머지않아 허물어졌던 경계는 곧 둥글었던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움직임을 멈춘 그림자의 주인은 다만 눈빛만이 상대가 살아있다는 단 하나의 신호라도 놓쳤을까 싶어 고요로 덮여있는 그 순간을 찬찬히 더듬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인형같다는건 과연 이런 모습을 이르는 말일까? 생명력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상태를?

흔히 인형을 묘사하는 '아름다움'과 '고귀함'과 같은 긍정적인 수식어는, 현재로써는 결국 두려움을 포장하려는 그럴듯한 변명에 그칠 뿐,

알리샤는 여전히 눈을 감고 미동도 없이 누워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도와줄 초월자를 잃을것 같다는 공포감이었을까, 아니면 거리낌없이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잃을 것 같다는 불안함이었을까.


데미안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부정한 기운은 알리샤의 몸에서 어느정도 몰아낸 터였지만, 아직 남아서 떠나지 않는 기운이 있었다.

손으로 받아낼 수  있는 정도의 한계.. 어차피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데미안이 후-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런 데미안의 고개가 차차 알리샤의 얼굴로 기울어졌다.

찬란히 쏟아지는 볕만이 내려앉았던 알리샤의 얼굴에, 조심스런 그림자가 잔잔한 물결처럼 밀려들어왔다.



간절한 마음으로 굳게 잠겨있던 입술이, 아무런 답을 주지 않을 것 같은 입술에 닿았다.



데미안은 속으로 빌었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이기를,

이 입맞춤이 마지막이 되어버리진 않기를...



멈춰버린 듯한 그 순간에도, 데미안은 빌었다.

자신이 선뜻 대답할 수 없던 질문을 또 다시 할 필요가 없게되길 바라면서.



찬찬히 고개를 들고 입술을 슥 닦아내더니 큭, 하고 웃어버리는 데미안이,

알리샤의 옆으로 털썩, 힘없이 쓰러졌다.






천장의 하늘빛이 까만 빛을 띄다 점점 회색빛을 띄었다.

흐려진 하늘로 시간이 흐르듯, 바람도 흘렀다.


흐르는 바람에 미동없이 누워있는 둘의 옷자락이 약하게 흔들렸다.

그런 둘을 지지하고 있는 나무도 바람을 따라 고개를 살살 움직였다.




천장의 구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먹구름이 한 방울, 두 방울 씩 물방울을 흩뿌렸다. 

데미안의 얼굴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데미안의 의식을 깨웠다.

주섬주섬 일어난 데미안의 눈엔, 볼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에도 반응없는 알리샤가 보일 뿐이었다.


"비 오잖아. 일어나봐.."

"..."

"일어나서 말 좀 해봐.. 눈 좀 떠보라고!"

그런 데미안의 역정에 반응하듯, 알리샤가 조금씩 눈을 떴다.


"너.. 나 보여? 괜찮아?"

알리샤는 말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할 뿐이었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은 고요하게 데미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톡톡, 이파리로 떨어지는 빗물만이 시간이 흐르고있음을 알렸다.

고요한 눈빛이 얽혀도, 데미안은 숨 쉬는 법을 잊은 듯,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런 순간을 깨고, 데미안이 와락, 알리샤를 안았다.


"나.. 좀.." 알리샤가 뭐라고 웅얼거렸다.

"어?"

"놔줘... 숨.. 막..."

"아," 하고 짧은 대답을 하며, 데미안은 얼른 포옹을 풀었다.


"너 얼굴이.. 비쩍 말랐네." 알리샤가 몸을 세우며 데미안의 얼굴을 살폈다.

"내가 약속했었잖아.. 너 지킬거라고. 근데.. 미안해.."

"음.. 나무도 시들었구나."

알리샤는 잠깐 눈을 감고는 중심을 잡고 앉았다. 알리샤의 손이 나무에 닿자, 알리샤를 중심으로 짙은 녹색빛의 기운이 온 나무로 퍼져나갔다.

푸석이던 잎들은, 전처럼 싱싱한 푸른빛을 띄기 시작했다.


"너, 괜찮은거지? 전이랑 똑같은거지?"

"마치 깊은 잠을 잔 것 같아. 날 해쳤던 기운은... 너가 다 가지고 있는걸?"

알리샤가 고개를 살짝 갸웃뚱 기울였다.


"널 살릴 방법이.. 그것 밖엔 떠오르지가 않았어."

"날 살려줘서 고마워."


알리샤가 데미안을 당겨 안았다. 데미안은 말 없이 안겼다.

그런 알리샤의 손길로부터, 데미안이 받아냈던 짙은 기운이 몸 속을 빠져나와 빗물 속으로 사라졌다.



후두둑, 소리를내며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옷에 떨어져 곳곳에 동그란 얼룩들을 남겨도,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알리샤의 편안한 웃음이 데미안의 어깨에 기댔다.

자신에게 기울어진 '살아있는' 알리샤의 무게가 허상이 아님을 느끼며, 데미안은 자신의 얼굴에 흐르는게 빗물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둘을 적시던 비가 찬찬히 멎더니, 차차 밝은 볕이 쏟아졌다.

















* - * - *

노트

* - * - *


데미안이 알리샤를 납치한 이유?

자신의 엄마를 부활시키는데 도움을 받으려고..  로 전 해석했어요.

딱히 이유를 알려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물론 지금 궁극의 이유가 그것이기에 제로에게도 신경을 쓰고 있는거고


물론 검은마법사의 지시로 그랬을 수도 있는데 알리샤에게 힘이 회복되면 데려간다고 한 것도

(검마가 굳이 납치해서 생명의 초월자를 해하려고 했다면 힘 회복까지 기다려줄 이유도 없음)그렇고


알리샤 봉인하고 지키는 수하들이 검은 마법사의 수하가 아닌 데미안의 수하이기 때문에

(물론 아예 데미안에게 알리샤를 일임했다면 그래도 될 일이지만) 결론은 데미안이 검마의 지시가 아닌 독단적으로 봉인하고 납치한걸로 결론 내리고 그렇게 썼어요.


뭐 검마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죠. 자신에게 딱히 나쁜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힘이 있으니 데미안 같은 부하가 뭘 하고 다니든 자신이 손 볼 수 있는 한도내에서는 그냥 내버려 두겠죠.(급 검은마법사의_마음을_조명해보자.txt)


왜 당연한 이야기를 주절거리느냐.. 고 할 수도 있을텐데.

저도 처음엔 데미안이 알리샤에게 해를 입힌 이유가 검마의 지시때문인가? 라고 생각해본적이 있어서 나름의 생각정리?

 _3편 이야기틀 작업 완료 후 노트




근데 제로 스크립트를 보니까 검은 마법사가 어느정도 지시를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한참 3편을 작업하다가 메이플 제로를 180을 찍으면서 새로운 퀘스트 스크립트를 읽게되고 잠시 멘붕이 빠졌었습니다.

나름 글 쓰기 전에,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퀘스트 정리 내용도 살펴본다고 했는데, 막상 세세하게 눈으로 확인하니 제가 생각하던 부분과 다른 부분이 있더군요.

약간의 모순이랄까.  제로 아예 안키웠으면 모를뻔..


그래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뒤집어야하는지, 바꿔야하는지 하여튼 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뭐 그게 뭐라고 별거 아닌 일이라고 충분히 생각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막상 스크립트를 마주하니 뭔가 머리가 복잡하더라구요. 가뜩이나 3편 대사가 매끄럽지 못해서 고민이 많았는데 후속타까지 연달아 맞으니 정신이 얼얼..


결국 이 글을 쓰는게 제 만족을 위해서 쓰는 경향이 강하다보니 뭔가 하나가 틀어지니까 전체적으로 답답한 상황에 봉착. 현재 이 글은 3편 뒤에 쓰일 작가노트지만, 아직 3편은 다 완성하지 못한 터......................................... 흑

 _3편 이야기 다듬기 작업 중 노트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벌써 끝을 향해 가는 이야기.. 

전 그런게 좋더라구요.. 한 문장이지만 여러 뜻으로 해석이 가능한 문장..

단어 하나지만 또 다르게 읽힐 수 있는 단어.. 

_3편 작업 완료 후 노트



150622 오타수정 및 문맥상 매끄럽지 못한 부분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