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x알리샤 / 메이플스토리 / 소설, 상플
[데미알리] 잔향 (1) 여름,
그 언젠가 해묵은 상처 다 아물어도
검게 그을린 내 맘에 그대의 눈물로
새싹이 푸르게 돋아나
그대의 숨결로 나무를 이루면
그때라도 내 사랑 받아주오. 날 안아주오.
단 하루라도 살아가게 해주오.
김동률 - 잔향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낙서를 하는 일도, 떨어져있던 돌멩이를 주워 탑을 쌓는 일도 이젠 더 이상 흥미를 끌지 못하는 일이었다. 쿨럭쿨럭. 내내 조용하던 그가 내는 유일한 소리라곤 메마른 입술 사이로 막지 못 해 튀어나오는 간헐적인 기침소리뿐이었다. 헌 때에 잔뜩 찌든, 한 때는 하얬을 흰 셔츠 소매를 대충 접어 올린 그는, 허름한 검정 바지에 잔뜩 달라붙은 흙먼지도 셔츠의 때와 같은 모양새로 남겨버릴 생각인지 털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의 차림새는 말하고 있었다. 차림새의 주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의욕을 잃었다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은 그런 세상으로부터 낙오된 자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는 듯 보였다. 언젠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명성은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린 지 오래라, 그렇게 힘도 명성도 잃어버린 패장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겨우 부지한 목숨을 연명할 의지가 없는 패장이었기에 더더욱, 세상은 관심이 없었다.
하얀 솜구름을 품어 언제나처럼 푸를 것 같던 하늘은 이미 묵중한 먹구름에 반절이나 먹힌 터였다. 점차 몸집을 늘려가는 먹구름을 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덧없다고. 과거의 언젠가, 하늘을 뒤덮는 먹구름보다 더 까만 먹빛으로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였던 자신을 생각해보자면 정말로 그렇다고.
데미안. 그 이름은 다시 숨을 쉬게 된 육신과 유일하게 남아있는 마지막 껍데기였다. 속이라곤 텅 비어버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그런 껍데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그가 하는 일이라곤 마당 바닥 혹은 침대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죽이는 게 일과의 대부분이었고, 가끔이나마 돌아오는 정신에 엉망인 집을 치우는 것이 특별한 일과이곤 했다. 유일하게 남은 피붙이 데몬은 아직도 안정을 찾지 못한 세계를 구하는데 힘을 보태야한다며, 씻어내지 못한 죄를 조금이라도 더 씻어내야 한다며 먼 길을 떠났기에, 데미안은 홀로 집에 남아 허름한 공간을 지켜야만 했다. 외롭게 남은 그는 청자를 바라는 모습은 아닌 채로, 입버릇처럼 같은 문장을 늘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곤 했다. 이건 지옥이야. 나는 지옥에 있는 거야.
언제나처럼 여전히도 지옥이었다. 아마 더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 그럴 수가 없을 테니. 발을 붙이고 사는 지금 이 현실의 순간순간이야말로 지옥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지옥이 새로 열린 건 아니었다. 단지 ‘다시’ 열린 것뿐이었다. 몸을 반이나 뒤덮던 흙더미 속에서 입 안으로 흘러들어온 흙을 뱉어내며 깨어난 순간부터, 지옥은 새삼스러울 것 없다는 듯이 다시 열린 것뿐이었다.
그렇게 목숨을 건진 후 소문으로 건너들을 수 있던 몇몇 이야기는 그의 지옥을 더욱 그럴듯한 지옥으로 만들어주곤 했다. 그를 살렸을 ‘생명의 초월자’는 제일 그녀다운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목격했었다고. 아마 소문에 대한 더한 뒷이야기도 있던 모양이었지만 데미안은 듣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자리를 벗어나버리곤 했다. 그 이상은 도저히 들을 자신이 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몇 번이고 마주하면서.
물론 그들이 구태여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하나하나가 그의 몸에 이미 새겨져있었으니까. 그건 마치 새로운 감각을 얻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시 숨을 쉬게 된 육신은 과거와는 달랐다. 볼을 스치고 가는 바람은 그녀의 잔잔한 노랫소리이고 연못 중앙에서 찰박이며 생기는 물결은 그녀의 심장 파동임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변해버린 스스로를 깨달았을 때, 그는 자신의 새로운 감각을 지독하게도 경멸했다. 새로운 감각이 받아들이는 모든 자극들은 주변의 끊임없는 물음 같았다. 어째서 그랬냐고. 왜 그랬냐고.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함께했던 그녀는 그럴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걸. 그러기에 새로운 모든 자극들은 당연하게도 스스로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얼토당토않은 망상의 연장일 거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신경을 타고 흐르는 자극들은 그가 밟고 있는 세계는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버린 그녀 자체임을 더욱 더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기에, 그는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침대 머리맡에 뚫린 작은 창과, 몇 걸음 거리를 두고 같은 벽에 나있는 출입문.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진 작고 네모난 공간에서 유일하게 바깥과 통하는 통로였다. 작은 창을 마주보고 있는 벽엔 둥근 탁자와 허름한 의자가 놓여있었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는 식은 지 한참 된 벽난로가 모양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어릴 적 살았던 집보단 작고 헌 곳이었지만, 그가 홀로 시간을 보내기에는 꽤나 적당한 공간이었다. 먹구름이 가득 몰려와 어두워진 집안을 깨달은 데미안이 탁자로 다가가선 제법 익숙한 손길로 부싯돌을 비비더니 촛불 하나를 밝혔다. 퍼뜩 피어오르는 불길에 이제야 정신이 든 양 집안을 살핀 데미안이 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너덜거리는 거미줄을 발견하고는 발끝으로 성의 없이 문댔다. 불쾌하게 발에 걸리는 느낌을 지우려 바닥까지 늘어진 두꺼운 식탁보에 발을 비비자 털썩거리며 묵은 먼지가 함께 뿜어져 나왔다. 쿨럭쿨럭. 데미안이 불쾌한 표정과 함께 팔로 입을 가려보았지만 심하게 터져 나오는 기침은 막을 수 없는 듯 이내 몸이 반쯤 구부러져선 공간을 흔들듯이 콜록거렸다.
심하게 기침을 뱉어낸 탓일까. 오늘도 마찬가지로 뚝 떨어져버린 입맛에 배를 채울 무언가를 입에 욱여넣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한 끼 더 굶는다고 해서 지금과 달라질 것은 없을 테니까. 촛농을 녹이 슨 작은 금속 쟁반에 한 두 방울 떨어뜨린 후 초의 중심을 세워 쟁반에 딱 고정한 데미안이, 쟁반을 들고는 조심스럽게 침대 옆까지 걸음을 옮겼다. 자칫하면 쓰러질까 싶어 조심스럽게 침대 옆의 낮은 서랍 위에 쟁반을 올린 그가 곧 풀썩 침대에 몸을 던졌다. 주름이 져 불편한 부분을 손으로 펴 대강 깔아 놓았던 요를 잘 정리한 데미안이 오는 잠을 막지 않겠다는 듯, 잠이 오길 기다리는 모양새로 느리게 천장을 읽으며 눈을 깜빡였다.
잠과 현실의 경계는 모호했다. 먼지가 가라앉은 냄새. 곧 축축해진 흙들이 뿜어내는 향. 곧 청각을 일깨우는 잎사귀들 두들기는 소리. 한참 향기와 소리를 머릿속으로 가늠해보던 데미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비가 온다!
몸을 일으키고도 잠시 현기증이 인 듯, 한 쪽 팔을 세워 몸을 지탱한 데미안이 창 밖에서 조금씩 비가 내리는 모양새를 멍하니 보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퍼뜩 몸을 일으켜선 문가로 향했다. 삐걱거리는 현관문을 젖히자 마당 한 구석에 만들어둔 간의 빨랫줄엔 마르고도 거두기를 몇 번이고 미뤘던 여러 빨래와 이불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대강 두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 나무줄기를 엮어 느슨하게 걸어둔 줄에 꾸역꾸역 널어놓은 빨래의 윗부분은 이미 비구름이 선수를 친 모양새로, 짙은 물의 얼룩이 져있었다. 기껏 빨아놓은 보람을 더욱 깎아먹을 수 없었기에 서둘러 널어놓았던 빨래들을 품 한가득 거둔 데미안이 집안을 왔다갔다하며 갤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다는 듯 열려있는 작은 창문 사이로 마구 던져 넣었다. 그건 다른 빨래보다 부피가 큰 이불도 다를 게 없어서 데미안의 우악스러운 욱여넣음에 잔뜩 꾸겨져선 창문 안으로 쑥 빠졌다.
한바탕 사투를 이겨낸 데미안이 잠시 집 지붕 경계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고는 자신에게로 떨어지는 비를 조용히 맞고 있었다. 머리카락 위로 떨어진 비가 얼굴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그 때,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떨어지는 빗소리를 가르는 조금은 낯선 소리에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어린 시절부터 고된 생활로 예민하게 발달한 청각은 익숙하지 않은 소리로 그의 시선을 옮겨주었다.
모습만은 익숙했다. 그리워했고 끊임없이 떠오르곤 했던 모습이었다. 금빛 머리칼의 주인은 숲의 푸른색을 담은 치마 차림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차분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치맛자락에 풀이 스치는 소리가 맨발 아래로 부서지며 빗소리와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세계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호명이었다. 그래, 분명 이름을 불렀다. 아니, 이름은 아니지만 이름 대신 수 천 번이고 대신 불렀던 별명을 불렀다. 다른 이들이라면 진정한 이름으로 알고 불렀을 호칭이었지만, 별칭과 더불어 진짜 이름이 있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불렀던 별명이었다. 하지만 별명의 주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한 발 두 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빗소리에 묻혀버려서 못 들은 걸까?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서있는다면 저 멀리로 가버릴 것 같았다. 한참 비를 맞던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와 반걸음도 안 남은 거리에서 또 그녀의 별칭을 부른 건 그 때문이었다.
“세계수.”
끝을 흐리지 않고 분명히 불렀다. 그래도 그녀는 듣지 못한 듯 했다. 곧 그의 팔이 먼저 그녀를 앞서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제야. 그제야 인기척을 발견한 그녀가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려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오묘하게 섞인 자신의 감정 때문에 읽히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데미안의 머리는 더욱 복잡했다. 제 감정을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나는 것도 같았다. 반가운 것도 같았다. 막상 그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단지 그를 올려다보는 눈은 흔들림 없이 그를 향해있었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 또한 그녀를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조금 세게 그녀의 팔을 쥐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데미안이 손에 힘을 빼곤 팔을 거두었다.
“죽었다 그랬잖아. 죽었잖아. 죽었었잖아. 근데…”
처음 루타비스에서의 총기 있는 모습도, 에레브에서의 재회 때처럼 안온한 빛으로 눈이 부시게 만들던 모습도 아니었다. 이미 그런 모습은 다 지워져버려서, 그녀의 모습은 기력이 다 쇠했던 최후의 결전 전날 그대로,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말에 답하듯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녀의 음성 없는 짤막한 반응이 싫었다.
“살아있으면!”
귀 끝까지 바짝 오른 열을 가라앉히지 못 하며 그가 중얼거렸다.
“살아있었으면….”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두들겼다. 정리되지 않은 단어들은 조금이라도 금방 튀어나올 기세로 목 끝까지 들어찼는데, 그의 입을 비집고 나오는 단어는 한없이 작았다.
“진작…, 날 찾아왔으면 좋았잖아. 난…….”
그의 음성이 작았던 것인지, 아니면 작지 않았는데 빗소리에 묻혀버린 것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점점 강해지는 빗발은 보다 도드라지는 소리를 남기며 땅으로, 잎사귀들로 쏟아지고 있었다.
“데미안.”
그녀가 이름을 부르며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처음으로 막막했던 얼굴에 작은 생기가 돌았다. 눈앞에 나타난 그리움의 현신이 처음으로 웃어보였다. 깊숙이 품고 있던 그리움, 그녀는 그리움이었다.
연한 풀빛색이었을 그녀의 옷자락은 비에 젖어 이미 짙은 녹색을 띄고 있었고, 볼륨감 있게 늘어뜨려 있었을 머리의 곡선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의 머리뿐만 아니라 어깨까지 축축하게 젖었음을 깨달은 데미안이 자신의 그리움에게 초대를 건냈다. 초라하지만 비를 피하기 알맞은 곳에 잠시만 있다 가라고.
굶는 게 일상이라 챙겨놓은 먹을 거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었고,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굴러다니는 헌 냄비 뚜껑만 애꿎게 열었다 닫은 데미안이 몸이라도 녹일까 싶어 집안을 뒤졌지만 불 뗄 장작도 다 떨어진 걸 발견하고는 이불장에서 짙은 색의 모포를 꺼내 그녀 앞에 섰다. 한참 부산스러운 데미안의 모습을 문간에 서서 보던 그녀가 그의 의중을 알겠다는 듯 차분히 반 바퀴 몸을 돌렸다. 막상 초대했는데 대접할 게 없다며 미안하다며 얼버무린 데미안이 모포를 양팔 너비만큼 벌려 펼치곤 그녀의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모포를 덮어주었다. 여차하면 흘러내릴까 모포자락을 잡아 옷을 여며주듯 정리해주던 데미안이 반쯤 품에 안은 온기에 말없이 눈을 감고 고개를 파묻으려다가 천천히 팔을 내려놓았다. 옷에서 떨어져 목재 바닥에 툭, 툭 소리를 남기는 물방울 소리만이 요란했다.
초대해놓고 대접할 양식도 없지만 비를 피할 지붕만은 있다고. 그러니까 비가 올 동안은 여기에 있다 가라고. 조금이나마 쉬다가 가달라고. 그건 부탁이기도 했고 붙잡음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의 호의에 고맙다며 모포를 바짝 추스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높이가 맞지 않아 덜그럭 거릴 탁자 옆 나무 의자보다 침대가 편할 거라며 침대에 앉아있을 것을 권한 데미안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손으로 모포가 흘러내리지 않게 잡은 것 치고도 느린 그녀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는 묻고 싶었다. 대체 성치도 않은 몸을 이끌고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 거냐고. 답이 궁금했다. 하지만 남기고 싶었다. 헤어짐의 순간까지 묻고 싶은 질문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헤어지기 전에 하나라도 더 묻고 대답할 거리가 생길 테니까. 채우지 않은 여백으로 한 켠은 남겨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비밀을 아는 순간 사라져버릴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도 여백의 의미에 한 몫을 하고 있었다.
촛농덩어리가 된 초를 치우고 새로운 초에 불을 밝힌 데미안이 그치지 않는 빗발을 창 너머로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욱 굵어진 빗발은 시끄러운 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개지 못한 빨래를 한 구석에 몰아놓은 데미안 덕에 어느정도 몸을 세워 앉아있던 알리샤가 곧 앉을 힘도 다한 듯 모포를 바짝 끌어올리곤 조심스럽게 몸을 침대 위에 뉘였다. 데미안은 몰아놓은 빨래 더미에서 반쯤 젖은 이불을 침대 옆 바닥에 대강 깔고는 털썩 누웠다. 그런 데미안 쪽을 향해 몸을 반쯤 숙인 알리샤의 치맛자락이 반쯤 흘러내리며 침대 모서리에 걸쳐졌다. 촛불만이 일렁이는 가운데 데미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죽은 줄 알았어.”
“죽었었지. 너도, 나도.”
“근데 살아있는 것도 같았어.”
“….”.
“세상 모두가 죽었다 그랬는데 세상만은 살아있다고 그랬어. 내가 미친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닌 거 같았어.”
“단지 있던 곳이 달라졌을 뿐이었어.”
“못 볼 줄 알았어.”
“…….”
침대 위의 그녀의 시선이 차분히 데미안의 시선에 매였다. 과거의 언젠가, 그는 이렇게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녀를 유리장식창 너머로 올려다본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 때와 달랐다. 그녀에게는 어떠한 제약도 부자유도 없었다.
한참 빗소리를 듣던 알리샤의 눈에 차분한 졸음이 쏟아졌다. 그 때처럼. 그녀가 감은 눈을 확인한 데미안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모서리에 걸쳐 흘러내린 그녀의 옷자락에 그의 손길이 날아갈 듯, 날아가지 않을 듯 고민하는 나비처럼 한참을 허공에 머물렀다. 허공에 머물던 나비는 곧 바닥으로 내려앉았고, 땅에 등이 배겨 불편한 몸을 한 번 움직인 데미안은 깊은 잠을 청했다.
간만에 든 깊은 잠이었다. 늘 괴롭혀오던 불면증이 없던 잠. 하지만 눈을 뜨고 난 그는 차라리 원래처럼 시달렸던 게 나았을 거라는 막연한 원망에 도달했다.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없었다. 뭔가 홀린 건 아니었는지. 그가 이불보에 코를 파묻었다. 속으로 깊숙이 파묻고 파묻으며 죽을 만큼 그리워했던 향은 이렇게 남아있는데. 향의 주인은 남아있지 않았다.
벌써 향에 익숙해져 버린 건지, 아니면 향마저 모조리 날아가 버릴 셈인 건지. 양 팔 가득 이불보를 끌어안으며 얼굴을 파묻은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다. 그리운 향이기도 하면서 왜 자신이 꽃잎을 주워 만든 비누 향이 같이 나고 있는 거 같은 건지. 설마 자신의 향인 건 아닌지.
“…비가 왔으면 좋겠다.”
그럼 그리운 재회를 또 한 번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우연히도, 당연하게도.
“…알리샤.”
그녀의 이름 석 자를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여전한 잔향을 온 몸으로 온 가득 그러안고는.
*
분명 12코 대비 원고 하기 전에 가볍게 손을 푼다고 시작했는데.. 그랬는데 (대과거형)
Aㅏ...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번에 추천받았던 3키워드 중 하메님이 주신 '비' 키워드를 써먹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신난다/
이거 이번 5회차 스터디 키워드 <놓치다>라고 해도 될 거 같은데 (히죽)
데미알리 보고싶드아아아아아아아
(+)
작업할 때 요즘엔 한글 A5 사이즈로 작업을 하는데 블로그의 한줄당 길이는 너무나도.. 길다. 한글에서는 두줄 이상되는 분량이 이 블로그에서 읽힐 땐 한 줄이 되어 올라가니까 읽는 호흡이 달라진다. 항상 블로그에 올리고 수정작업을 할 때는 폰으로 하는데 폰이 그나마 한 줄 분량이 문서작업할 때랑 길이가 비슷해서 호흡이 비슷하게 나온다...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 고민이 깊다. pc버전으로 보면 가독성이 너무 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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