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여루미] 그림의 의미

/르비앙


한 때 그림을 그리던 적이 있었다. 그 땐 인생의 모든 방향이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방향으로 가는 모든 길이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갈 수 있는 길이 없으니, 그 방향의 끝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좌절을 경험하며 접하게 된 많은 경험들이 그 끝에서 하게될 일과 비슷한 일을 직업으로 삼게해줬다. 여러 그림들의 진위를 감정하고 그 가치를 매기는 것. 마음껏 그릴 수는 없지만, 원 없이 볼 수는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의 판단 하나로 그림들 스스로가 잊고 살아가던 의미를 찾아주기도 했고, 도리어 볼품없는 모조품임을 밝혀내 그림 주인들의 실망한 모습을 보기도 했다. 루미너스라는 이름이 유명한 미술품 감정인으로 소문나자, 그녀에게 자신들이 소유한 그림의 가치를 묻기위해 그녀가 세운 사무실에도 방문하는 이가 하루에도 셀 수없이 많았다.


그녀는 활동할 때는 불편하지만 깔끔한 느낌을 주는 오피스룩을 입는 것을 좋아했다. 단추가 달린 주변을 따라 하늘거리는 물결이 달린 분홍빛 블라우스에 무릎 위까지 딱 붙는 검정 스커트.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스타일링 중 하나였다. 루미너스가 실내에서 답답한 구두 대신 신은 슬리퍼 소리만이 사무실 바닥을 스치며 간간히 들렸다. 하얀 머릿결에 덧없이 어울리는 검정 안경은, 그녀의 감정인으로서의 딱 떨어지는 모습을 부각시키는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다.


루미너스가 잠시 액자들을 덮어둔 천을 거두기 전, 자신의 사무실을 죽 둘러봤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가구들은 사무실을 개업하면서 일일이 그녀의 의견을 거쳐 배치되었다. 문을 열고 바로 보이는 -회의실에나 있을 법한- 넓은 사각 책상과, 벽을 빼곡히 메운 책장들 안엔 마치 도서관을 떠올릴만큼 역사며 예술이며 문학이며 할 것 없이 수많은 분야의 책들이 꽂혀있었다. 출입문 바로 옆으로 움푹 들어가 시작하는 벽을 따라, 그 곳엔 일부러 낮은 책장을 두어, 그 위에 각종 차나 커피를 두어 다니면서 쉽게 마실 수 있게 정리해두었다. 넓은 사각 책상 옆엔 뒤엔, 밤을 맞아 블라인드에 가린 넓은 창문을 등지고 있는 개인 책상이 있었다. 그 책상 위에 놓여있는 스탠드 밑으로, 미술품 감정에 쓰일 도구들이 빼곡히 정리되어있었다.


액자로 만들어 더욱 무거운 미술작품을, 개인 책상의 의자 뒷편으로 옮기며 손목이 아파 루미너스가 잠깐 쉬기를 결심하곤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자 쓰고 있던 안경이 비스듬히 콧등을 타고 내려왔다. 루미너스가 한 손으로 도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땐 쓰지 않는 안경이었다. 문을 열고 손님이 찾아올 때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곁에 놓여있는 안경을 쓰는 일이었다. 혼자 있으니 벗어버릴까, 싶어 다시 안경쪽으로 손이 간 루미너스가 잠시 멈칫 하더니 도로 그 손을 내려놓았다.



감정을 좋게 받아도 경매장에서 경매될 수 없는 그림들이 있었다. 그 그림들은 대체적으로 꽤 복잡한 사연을 갖고있는 그림들로써, 그런 그림들은 이 사무실을 통해, 루미너스를 통해 개개의 거래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만나게 된 자들 중, 턱없이 부족한 가격을 부르며 그림 하나를 사길 원하는 손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팬텀이라고 소개했다.


미술품을 차곡차곡 옮기는 와중에 출입문 상단에 달린 종이 흔들리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시선을 돌린 그 자리엔 남색 정장차림으로 쫙 빼입은 팬텀이 나타났다.

그는 여느 손님들보다 늘 차려입은 모습으로 항상, 문 앞에 Closed가 걸린 후에 들어왔다. 루미너스는 팬텀이 들어오는 모습을 한 번 일별하곤 다시 미술품을 마저 옮겼다. 그런 루미너스의 모습이 자연스럽다는 듯 팬텀 또한 자연스럽게 커피가 놓인 낮은 책장에 다가서서 컵을 꺼내곤 우아하게 커피를 타보인다.

그가 스스로 커피를 타는 일 또한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루미너스는 그런 그에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 은은한 커피향은 늘 그녀에게 기분좋은 향이기도 했으니까. 실은 처음 영업 시간이 지나서 찾아온 팬텀에게 커피를 타주며 왜 굳이 밤에, 다른 것도 아닌 커피를 마시냐고 물으려다가 만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점점 그의 방문이 일종의 당연한 일처럼 되면서, 커피를 타는 것은 그의 몫이 되었다.



커피를 타고 돌아다니던 팬텀이 루미너스가 옮겨 놓고 다시 천을 덮어놓은 그림들 앞에 멈춰섰다. 그림을 다 옮긴 후 노트북을 들고 넓은 사각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은 루미너스가 그런 팬텀을 한 번 일별하곤 도로 자신이 할 일을 시작했다.

팬텀은 하나의 망설임도 없이 천을 거둬냈다. 여러 액자들 제일 앞으로, 캔버스 하나가 놓여있다. 걸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 캔버스 오른쪽에 몸이 반 쯤 걸쳐진 누군가의 어깨선부터 발끝까지 그려져있는 그 그림은 어딘가 그리다 만 듯 보였다.


"보존 작업도 안 거친 작품을 거래할 리는 없고. 당신 작품이야?"

팬텀이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오랫만에 붓을 잡아보고 싶어서 그렸죠. 오래 잡질 못해서 완성은 못 했지만."

그림을 살피던 팬텀의 눈에 창문 옆 사무실 구석진 곳 세면대에 깔끔히 손질되어 마르고있는 붓이 보인다.


"뭘 그리려 했던거야? 뭔가 익숙한데?"

"다시 덮어둬요. 나도 의미도 모르고 그린 그림이니까."

"슬퍼보이는군."

대뜸 팬텀이 미완의 그림을 보고는 감상평을 던졌다. 루미너스 스스로도 뭘 그렸는지 잘 모르는 그림. 잡념을 떨어내려고 매우 오랜만에 다친 손목이나마 겨우 붓을 놀려 이유없이 떠오르는 상을 그려낸 그림이었다. 한참 집중해 그리다가 손목이 아파 정신을 차리고 보았을 때, 그녀 스스로도 뭘 그렸던 건지 알 수 없었다. 팬텀은 미완의 그림 감상을 마친 듯 도로 천으로 캔버스를 덮어버리고는 천천히 루미너스를 향해 걸어왔다.




루미너스의 노트북 옆에, 사각 책상이 마치 의자인 듯 팬텀이 자연스럽게 앉아보였다. 이런 모습 또한 처음이 아니니 루미너스는 뭐라고 한 마디 하는 것도 그만 뒀다. 그렇게 책상에 올라앉은 팬텀이 커피잔을 쥔 채로 루미너스를 내려다봤다.


안경을 고쳐쓰다 새끼손가락이 렌즈에 닿아 뿌연 지문을 남겼다. 그 얼룩이 신경쓰인 루미너스가 잠시 안경을 벗고 안경을 닦을 천을 찾으려 두리번 거릴 때, 팬텀은 기다렸다는 듯 내려놓은 안경을 집어들었다. 안경을 멀찍히 눈과 같은 높이에 올려보인 팬텀이 실망한 듯 말했다.


"뭐야.. 도수도 없는 안경이잖아."

"내려놔요."

"눈 때문에 일부러 쓴 거야?"

그가 말하는 '눈'은 시력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눈. 양안에 담긴 서로 다른 빛깔의 홍채.


"안 쓴 게 난 더 좋은데."

그녀가 안경 닦을 천을 찾아내선 대꾸없이 팬텀에게서 안경을 빼들어 닦아낸 후, 아까처럼 써보였다.


노트북 자판음이 들리는 와중에 은은한 커피향이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팬텀은 자신이 쥔 컵을 조금씩 홀짝이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있는 루미너스를 내려다본다. 그런 시선이 더욱 신경쓰인 루미너스는 더욱 자판음을 부산스럽게 내본다.


"왜 저 책상가서 일하면 될 걸 굳이 이 회의할 때나 쓸 넓은 책상에서 일하는 거야?"

"...혹시 오실지 모르는 손님을 위해서죠. 저 안 쪽은 바깥에서 안 보여서, 헛걸음하면 안 되니까."

"여기 영업시간 끝나지 않았어? 걸어놓은 Closed. 저건 장식이야?"

"진정한 작품의 참 의미를 알고자 하시는 분들은 시간을 가리지 않죠."

"나 같이?"

땡그랗게 눈을 뜨고는 루미너스의 눈을 바라본다. 서로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힌다. 그 시선을 먼저 거둬들인 건 다시 노트북으로 고개를 돌린 루미너스다.


"당신은.. 가져오는 건 없이 가져가길 원하는 손님이죠."

"뭐야, 잘 알고 있네. 그러면서도 내가 가져가는 걸 허락치 않는 거야?"

"당신 말처럼 헐값에 팔 작품이 아니라고 난 이야기 했어요."

"실은 난 협상할 필요는 없어. 그냥 아무도 모르게 들고나갈 수도 있는 일이거든. 근데 그러면 그 쪽이 곤란한 상황에 쳐할까봐 봐주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비상식적인 부분까지 제가 생각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도둑질이 자랑할 일인가요?"

"도둑질은 안 해. 단지 원래 물건이 있어야 어울릴만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 뿐이지."

"그걸 일반 상식으로 도둑질이라고 합니다, 도둑씨."

"도둑 아니라니까!"

"..."

"..."


잠깐 찾아온 침묵 속 서로를 빤히 쳐다보고는, 다시 원래 하던 일로 눈을 돌리는 루미너스다.


"당신 생각이 정 그렇다면 저 그림은 더 어울릴 소유자에게 제 값을 받고 팔려가겠죠. 내가 감정한 만큼."

"그럼 난 또 다른 그림을 협상하러 계속 오겠지.. 습관처럼."

"..."

"그 쪽도 그런 모습에 익숙해졌잖아, 벌써."

노트북 자판음이 멈춘다. 머리로는 부정하지만, 마음은 부정해보일 수 없다.


"손목도 좋지않아 오래도록 붙잡고 있지도 못하는 노트북을 늘 그 자리에 올려놓고 나와 이야기 하는 것."

"..."

"붓도 오래 못 잡는 상한 손목으로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는 거지?"

커피잔을 반대편에 내려놓은 팬텀이 루미너스의 손목을 잡았다. 한 줌에 손목이 다 감긴 루미너스가 잠시 멈칫하더니, 곧 가라앉은 표정으로 팬텀을 올려다본다.


"내가 꼭 작품을 사려고 드나들었다고만 생각하진 않을 거 아냐, 그 쪽도. 안 그래, 루미너스?"

등 뒤에서 꺼낸 장미를 톡톡, 자신의 얼굴에 두들겼다가 루미너스 앞으로 내미는 팬텀이다.




창 밖 너머로 빠르게 도시의 밤이 지나간다. 규칙적이게 세워져있는 가로등의 길쭉한 빛들이 수없이 지나간다. 자신의 기사가 몰아주는 차 뒷자석에 삐뚜름하게 누운 팬텀이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장미를 바라본다. 계획대로라면 자신의 손에 있지 않아야 할 장미가 버젓이 있는 걸 보며 팬텀은 헛헛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아예 그 장미 줄기를 잡아선 이유없이 창에 톡톡 두들긴다. 빨간 꽃이 창에 부딪히며 소리를 남긴다. 아까 마신 커피 때문에 괜히 정신이 더 또렷해진다. 오늘의 꽃 선물은.. 까였다.



그가 나간 문은, 바깥을 향해 Closed라 써있는 작은 나무판을 매단 그 문은, 도리어 Open이란 단어를 그녀에게 내보인다. 그 문에 박힌 시선은 한참을 움직이지 못한다. 안경을 벗어서 쥐고있는 손으로 눈을 문질러본다. 그가 비워버린 커피잔의 잔향이 훅 느껴진다. 이제 책상에 놓여있는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이유없이 그리다 만 자신의 그림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서도 의미를 알 수 없던 그림. 어딘가 익숙한 모양새로 뒷모습만이 그려지다 만 캔버스 속 그림.

그렇게 미완의 뒷모습이 누구의 뒷모습인지 차근히 겹치며 떠오른다.


방금 떠나간 그가 남긴 뒷모습의 일부.

팬텀, 그가 남긴 뒷모습의 일부.




그녀의 시선은 문을 뜨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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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어디서 읽었다고 착각될만큼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디테일한 기억.. 그 기억을 글로 담아 계사님께 드립니다. 그 조각글 '안경' 아니었으면 빛 못 봤을 내용! 꿈에서 여루 느낌이 영화<베스트오퍼> 남주인공이었던 예술품 감정인의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물론 계속 올려주시던 그 gif의 안경 쓴 여자분 이미지랑 섞여서.


꿈을 푸는 게 참 재밌네요. 그 이미지를 기억해내다보니 배경이나 외형묘사에 강하지 못한 편인 제 글을 매우 풍족하게 해주는...

마지막 문패가 참 마음에 들었어요. 겉으로 보기엔 closed지만 안에선 open이라고 써있는.. 뭔가 겉으로 무관심하면서도 속으로는 여지를 남기는 여루의 모습.. 흐뭇.

밤인데도 커피를 마시는 것. 루미너스는 커피향이 좋다고 이야기한 다음에 왜 밤에 커피를 먹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는 문장이 나오죠. 팬텀이 루미너스가 커피향을 좋아하는 걸 알고 일부러 커피를 마신 것으로... 치밀한데?

"진정한 작품의 참 의미를 알고자 하시는 분들은 시간을 가리지 않죠." / "나 같이?" - 이 부분에서 '진정한 작품'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느낌이 참 좋더라구요. 흐흣

여루가 넓은 책상에서 작업하는 이유는 물론 closed 이후에도 올 손님들을 기다리는 것도 있겠지만 앞에 '...'으로 대사를 시작한 것은 - 팬텀이 앉아서 내려다볼 자리를 위해서 그랬을 것이라는 깨알같은 추측이 가능한 대목.


실은 여루 말투를 반말체로 쓰고싶은데 저 이미지에서 반말을 쓰면 너무 친근한 사이가 되어버려서...아...... 제게 돌을 던져주세요...


 

영업의 끝은..  연성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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