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알리/뮤드큘AU] At last – 01.

데미안 알리샤 / 메이플스토리 / 소설, 상플


 막 고개를 든 작은 꽃송이들이 길을 따라 피어있었다. 온 몸을 꽁꽁 싸매야만했던 추웠던 겨울이 지나며 찾아온 봄은 이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잔뜩 겨울 공기에 말라서 갈라져있던 흙바닥들은 아직도 거칠어서, 걸음을 옮기는 사람에겐 편치 못한 행로를 제공하는 중이었다. 

 열차 시간에 맞추어 역사에 도착하기 위해 알리샤는 부지런히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옆을 지나가는 마차들을 피해 길의 가장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걷고 있던 알리샤가, 또 한 번 지나가는 마차가 일으킨 뿌연 흙먼지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머리를 정돈하고 머리에 쓴 진주빛의 챙 넓은 모자를 고쳐 쓰며 알리샤가 중얼거렸다.

 “그냥 마차타고 갈 걸.”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몸이 먼저 길로 나섰던 터였다. 하지만 자신이 걷는 사이에 지나간 마차의 대 수를 대충 어림잡아도 다섯 손가락을 훌쩍 넘어가는 것을 깨닫고는 알리샤가 후회어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서 마차를 탈 걸. 그러면 이렇게 흙먼지 뒤집어쓰면서 안 가도 됐을 텐데. 짐이라고 할 수 있는 건 한 손에 접어 든 분홍 양산 하나 뿐이었기에 쉽게 걸어서 가리라고 마음을 먹었던 터였다. 하지만 일부러 옷과 같은 색으로 맞춰 입은 진주색 치마 끝자락에도 꽤나 흙이 묻은 것을 보며 자신의 선택이 썩 괜찮은 선택이 아니었음을 걷는 걸음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옷이라도 갈아입고 나왔어야 했어.”

 런던에 머문 것도 이제 3개월 째.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던 시그너스의 초대로 휘트비의 저택을 떠나 그녀의 저택에 머물며 런던 사교 모임에 어울린 지도 꼬박 3개월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저택의 정원 풀밭에서 자리를 펴고 한가로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던 중 번뜩 생각난 기차 시간 때문에 서둘러 이것저것 챙기지도 못하고 저택을 나섰기에, 갈아입지 못하고 나온 옷차림은 평소보다 많은 걸음을 필요로 하는 기차역까지의 행로에 꽤나 불편함을 선사하고 있었다. 

 알리샤가 한껏 멋을 차리려 끼고 있던 진주빛 장갑을 벗어서 한 손에 쥐어보였다. 그리곤 들고 있던 양산과 함께 쥐고는 잠시 멈추어 숨을 골랐다. 솔직히 멋을 부리려고 굳이 진주빛 장갑을 가지고 나온 것도 있었지만, 약혼자가 선물해줬던 장갑이었기에 끼고 나온 것도 있었다. 하지만 조금은 꽉 껴서 불편한 장갑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그 이를 만날 수 있어.”

 한 시라도 빨리, 누구보다 먼저 약혼자를 만나기 위해 뛰어나온 걸음이었다. 조나단, 그를 위해 옮기는 걸음이니 결코 힘든 걸음만은 아니었다.


 기차 소리가 점차 가까운 거리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거의 다 온 것 같은 걸? 잘 찾아 왔나봐! 후, 하고 안심하며 숨을 돌린 알리샤 앞으로 철로가 보였다. 물론 그 철로를 발견하기 전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은 기차가 지나가지도 않는데, 그 철로를 건너지 않고 그저 서있기만 하는 한 신사의 모습이었다.

 점차 알리샤가 철로 가까이로 발걸음을 옮기자 기차의 소리가 점차 가까워 들리기 시작했다. 곧 기차가 철로를 지나가야 한다며 잠시 철로의 접근을 막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까부터 그 철로에 가까이 서있던 신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그들에 대한 답을 했고, 알리샤는 일부러 속도를 줄여 철로 가까이로 걸어가선 신사 옆에 나란히 섰다. 조심스레 돌린 시선으로 신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종아리 부근까지 내려온 긴 검정 코트 아래로 다리에 딱 붙는 검정 바지가 눈에 띠었다. 그 또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온 듯, 목이 높은 신발 주변에도 흙이 묻어있었다. 신사가 가볍게 걸친 검정 코트는 목 뒤쪽을 감싸며 한껏 깃이 솟아있었는데, 그 때문에 검정 깃에 겹쳐진 붉은 머리카락이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그가 입은 코트의 소매로 삐져나와 하늘거리는 하얀 셔츠의 소매는 신사가 손으로 잡고 있는 검정 모자에 가려 그 끝이 겨우 보일 듯 말 듯 하였다. 

 알리샤가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그녀의 옆에 서있던 신사가 고개를 돌려선 알리샤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낮은 시선에, 얼굴 또한 모자의 챙으로 가려져있었지만, 신사는 그 사이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곤 놀란 듯 짧게 소리쳤다.

 “...알리샤!”

 “네?”

 기차가 내는 소음이 더욱 가까워져서 자신의 옆에 서있던 신사가 내뱉은 말을 듣지 못한 알리샤가 신사를 쳐다봤다. 눈동자가 마주치자 신사는 더욱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더니 입 또한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알리샤는 자신의 목소리가 기차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큰 입모양을 보이며 물었다.

 “뭐라구요?”

 “정말... 당신이...”

 알리샤의 한 마디에 신사가 잠시 얼이 빠진 듯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곧 장갑을 끼지 않은 신사의 손이 알리샤의 얼굴 높이로 찬찬히 올라왔다. 알리샤가 갑작스런 신사의 행동에 놀라 뒤로 한 발을 뺐다. 기차가 지나가며 고요함이 남은 공간 속에서 신사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알리샤.”

 “우리... 언제 만난 적이 있나요?”

 알리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통성명도 안 했으면서 어떻게? 알리샤가 다시 물었다.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보이는 상대의 안대에 알리샤의 눈썹이 이마 쪽으로 살짝 올라갔다. 검정 바탕에 아마도 집안의 문양이 새겨진 듯한 안대를 하고있는 상대를 보며 알리샤는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귀족임이 분명한데. 안대를 한 귀족이라면, 그래서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다면 기억이 나야할 것 같은데?

 “제 이름을 아세요?”

 “...제가 아는 그녀와 너무도 닮았네요.”

 “이름까지도?”

 “...”

 상대가 대답을 하지 않자 아, 하고 짧게 내뱉은 알리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살짝 무릎을 굽혀 보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어쩌면 제가 실례를 범한 것일 수도 있겠어요. 어쩌면 신사 분께서 저희 집안의 저택에서 여는 파티에 오셨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니 어디선가 뵌 적도 있는 것 같네요.”

 “...”

 “......”

 알리샤는 자신의 사과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이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상대의 시선에 어떻게 해야 할지 살피는 듯 싶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겨우 정신이 든 듯 신사가 예를 차리며 말했다.

 “영국의 바람이 참으로 좋습니다.”

 “영국에는 처음이신가요?”

 “네.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답을 한 신사는 알리샤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다른 말을 하려는 듯 보였고, 이에 알리샤는 상대의 시선을 어색한 미소로 받아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살짝 뒷걸음질을 치며 휘청인 몸을 다시 가누려는 핑계로 알리샤가 겨우 그 시선을 피했다. 알리샤의 그런 모습에 불쑥 잡으려는 듯 팔을 뻗은 신사가 그녀가 괜찮은 것을 확인하곤 팔을 내리곤 곧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와 정중히 자기소개를 했다.

 “제 이름은 데미안입니다. 아, 당신은 백작이라고 부르시지 않으셔도 돼요. 당신은 그저 제 이름만 불러주시면-”

 “네?”

 “아, 아닙니다.”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대의 모습에 알리샤는 자신의 손에 쥔 장갑을 꼭 쥐어보였다. 그래, 이제 기차도 갔겠다, 그냥 걷기만 하면 되는 거야.

 “기차는 이곳을 지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역에도 도착하지 못하겠지요.”

 “뭐라구요?”

 “제가 이쪽으로 올 기차들을 모조리 다 탈선시켰거든요. 당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요.”

 “진심이세요?”

 알리샤는 자신의 목소리에 약간의 겁이 섞여있는 걸 깨달으면서 물었다. 아까부터 전혀 읽어낼 수 없는 상대의 모습에 도저히 가늠이 가지 않았으니. 알리샤의 심각해진 표정을 읽은 데미안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농담입니다.”

 매우 진지하게 말해놓고는, 더욱 농담 같지 않게 ‘농담입니다.’ 라고 말하는 상대를 보며 알리샤는 하, 하고 짧은 숨을 내뱉었다. 그런 알리샤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데미안이 말을 더 덧붙였다.

 “웃을 줄 알았는데...”

  너무도 순수한 눈빛을 지어보이며 자신의 농담이 웃기지 않았냐고 묻는 상대에게 알리샤가 도리도리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요.

 알리샤의 반응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리샤가 걸어왔을 길과 그 주변을 휘 살피며 물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꽤나 먼 걸음을 하신 것 같은데 왜 마차를 마다하고 이렇게 걸어오신 겁니까? 동행도 없이?”

 이제야 상대가 보이는 꽤나 정상적인 반응에 알리샤가 잠시 안도하며 답했다.

 “제 불찰이었어요.”

 “마차라도 당장 불러드릴까요? 말씀만 해주십시오. 제가 조금이라도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니에요. 거의 다 온 걸요.”

 알리샤가 웃으며 철로를 차분히 걸어서 넘었다. 하지만 그 신사는 여전히 아까처럼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백작님은 안 가시나요? 아까부터 계속 거기 서 계셨던 것 같은데. 누굴 기다리시나요?”

 “기다렸습니다. 그 긴 시간을... 만나기위해서.”

 “...”

 상대가 하나하나 내뱉는 말 하나하나에 보이는 꽤나 깊은 애수어린 눈빛에 알리샤는 당황한 기색을 겨우 가리며 대답했다.

 “기다리는 분이 영국까지 만나러 오셨다던 그 분이신가요? 꼭 그 분을 만나시길 빌게요. 그럼 이만-”

 “한 번 불러주시겠습니까.”

 “..네?”

 “백작이란 작위 말고, 제 이름 말입니다.”

 “아니, 제가 백작님을 그렇게 불러도 될지-”

 “...한 번만..”

 한 번만. 그 말을 하는 신사의 눈빛은 너무나도 간절해서, 알리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데미안...백작님이라고 하셨던가요?”

 “......”

 “아, 죄송해요. 제가 괜히 함자를 불렀네요. 짧은 인연,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가웠어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만나야할 사람이 있어서 어서 가봐야 하거든요. 영국에서 좋은 시간 보내시길.”

 알리샤가 또 한 번 짧게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곤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알리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신사가 깊이 숨을 쉬어보이더니 말했다.

 “결코 짧은 인연이 아닙니다. 400년 동안 기다렸어요, 당신을.”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신사가 말을 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모자가 떨어질까, 다시 한 번 꼭 모자 끝을 잡아 보인 신사가 말을 이었다.

 “머지않아 당신을 꼭 만나 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