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알리샤 / 메이플스토리 / 소설, 상플

데미알리 기일(2.25) 추모를 위한 40p 중철본 전문

바뀌기 전 제목 : <연연불망(戀戀不忘) : 그리워 잊지 못했기에>

사령 데미안을 메인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실물 중철본 관련 작가 메인트윗 확인



다시 떠나보내다

데미안 & 알리샤


르비앙



난 너에게 무엇을 주었나.

난 도대체 무엇을 주었나.

길을 잃을 땐 언제나 나를 붙들어 준 너에게

내가 사랑한 너에게


난 널 위해 무엇을 잃었나.

난 도대체 무엇을 잃었나. 

아직 따스한 너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는데

이렇게 남아 있는데


김동률 – 다시 떠나보내다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었어야 했다.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비참한 인생. 용서 받을 길이라곤 찾을 수 없는 낭떠러지 인생. 겨우 추스른 몸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고, 쉼 없이 마른기침을 뱉을 때마다 쉽사리 터져버리는 입술은 까슬거렸다. 아주 천천히, 데미안은 문자 그대로 죽어가고 있었다.

 몸이 무너지면서 정신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숨을 헉헉거리며 번뜩 정신을 차려보면, 우거진 숲속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잠을 잔다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는데…. 맨 발바닥은 흙투성이였고, 입을 때만해도 보송하게 말라있던 하얀 반팔은 온통 땀범벅이 되어 피부에 철썩 붙어있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쿨럭쿨럭 기침소리를 숲 속 가득 내뱉은 데미안은, 순간 까매지는 시야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겨우 몸을 일으키려 해도, 땅을 짚은 팔은 자꾸 무너져 내렸다. 후들거리며 힘이 가지 않는 팔을 열심히 내질렀지만, 역부족이었다. 데미안의 상체가 아예 바닥으로 쓰러지며 한 쪽 뺨과 함께 데미안의 몸이 땅을 굴렀다. 입 안으로 흙 입자들이 굴러들어왔지만, 뱉을 힘조차 나지 않았다.

 몇 번인가 있던 일이었다. 며칠 간의 공복 끝에 이렇게 쓰러져 버리는 일 정도는. 집에서든, 오늘 같이 정처 없이 떠돌던 숲속에서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쓰러지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늘 정신을 차렸고, 죽어야 했을 것 같은 몸뚱아리에는 숨이 붙어있었다. 마족의 피가 섞여 쓸데없이 질긴 목숨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분명 그랬는데-

 저 멀리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누군지 확실히 기억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까무룩 데미안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분명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실루엣은 이런 반갑지 않은 존재의 실루엣이 아니었는데….

 방금 막 정신을 차려 겨우 몸을 세워 앉은 참이었다. 지근거리에 서있는 존재로부터 느껴지는 불쾌한 기운에 데미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군단장으로 활동하면서 몇 번 마주할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 소름끼칠 정도로 오싹하고 찝찝한 기운을 완연하게 뒤집어쓴 힐라는 처음이었기에, 데미안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 참, 이러면 곤란한데.”

 그런 데미안의 반응이 달갑지 않은 듯 힐라가 비꼬는 말투로 빈정거렸다. 흙바닥에 덩그러니 앉아있던 데미안이 벌떡 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생기가 다 죽은 피부색부터 음침한 기운이 뚝뚝 흐르는 검은 옷차림에 잘 벼려진 낫까지. 좀체 붉은 머리칼 말고는 원래 알던 힐라와는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힐라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데미안을 쏘아보고 있었다. 데미안도 지지 않고 힐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같잖다는 비웃음과 함께 말했다.

 “내가 군단장을 그만 둔 이후로 검은 마법사의 취향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한 단어로 표현해줄까? 불쾌해.”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부터 힐라가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닿으니, 데미안은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무슨 용건이든 간에 힐라는 검은 마법사의 충실한 수하이니 접점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것이었고, 그러니 주저할 필요도 없었다. 

 보란 듯이 힐라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 데미안의 등 뒤로 힐라 특유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부름에 응하지 않았는지 알겠네.”

 “부름? 검은 마법사가 날 부르기라도 한다고?”

 멈춰선 데미안이 고개를 돌려 힐라를 쏘아보았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쁜 웃음을 지은 힐라가 낫등을 차분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분은 아주, 아주 바쁘신 분이시지. 그분이 네 따위가 뭐라고 신경을 쓰겠어.”

 “뭔 소리를 하던 간에 난 다시 안 돌아가. 개수작 부리지 말고 돌아 가. 검은 마법사랑은 두 번 다시 엮일 일 없어.”

 잘못된 선택은 한 번으로도 족했다. 바닥까지 추락했지만 결코 전처럼 돌아가지 말자고, 몇 번이고 스스로 다짐한 터였다.

 “글쎄. 넌 아직도 네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

 단호한 데미안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힐라가 조금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죽어가고 있을지언정,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데미안에게 그 질문은 답할 필요조차 없는 아주 이상한 질문이었다.

 “죽어? 내가 왜 죽어? 그만 해라 이제. 재미없으니까.”

 “진실을 알고 싶거든 알리샤에게 물어봐.”

 힐라는 자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던지고 있었다. 알리샤가 메이플 월드를 위해 희생하며 죽은 건 메이플 월드의 주민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힐라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알리샤야말로 죽었잖아.”

 “이런, 그 반대는 아닐까?”

 “무슨-”

 “네가 살고 알리샤가 죽은 게 아니라, 네가 죽고 알리샤가 살아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알고 왔는데.”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데미안은 힐라의 말이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다시 원래 가고자 했던 길로 고개를 돌리고 넓은 보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언제 다가온 것인지 바로 등 뒤에서 힐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름 가까이 굶어도 죽지 않는 건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결국 픽픽 쓰러지는 건 또 누가 구해주는 걸지… 궁금해본 적 없어?”

 오싹 목 뒤로 솟아나는 소름에 데미안이 신경질적으로 뒤돌았다.

 “왜. 너야? 그거 참 끔찍하네.”

 “아니, 난 나라고 한 적 없는데. 이렇게 나오니,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

 “….”

 “궁금하면 또 미친 듯이 방황하다가 쓰러져보든가. 운이 좋아서 평상시보다 일찍 정신을 차리면 답을 알 수도 있겠지?”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제발 가지?”

 “아, 이젠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만나기 힘들지도 모르겠네.”

 “…누굴 이야기하는 거야?”

 지독하게 혼자였다. 세계수 정상에서 칼을 맞고 난 후 끊긴 기억은 리프레 숲 속의 작은 오두막집에서부터 다시 시작했고, 그 기억은 오로지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시간들이었다. 지인도, 가족도, 한 때의 정인도 없는 오로지 혼자만의 기억. 리프레로 온 이후로 주변엔 누구도 없었다.

 “어째서 메이플 월드의 숲들이 요즘 들어 점차 푸른빛을 잃어 가는지 생각해본 적 없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할 이유도 없었고, 생각할 여유도 없었으니. 늘 아픈 몸에 시달리느라 주변을 살필 겨를 같은 건 없었으니까.

 “이렇게까지 힌트를 줘도 못 알아듣다니, 한 때의 데미안도 다 옛날이야기군. 내가 그랬잖아. 알리샤는 죽지 않았다고.”

 “알리샤가… 살아있다고…?”

 죽은 줄만 알았던 그리운 이름이 살아있다니. 한껏 강성하게 나오던 데미안의 기세가 한풀 꺾인 채로 힐라를 마주하고 있었다. 멍하니 주변을 배회하는 데미안의 눈동자를 차분히 읽어낸 힐라가 설명을 덧붙였다.

 “쓸데없이 힘을 쓰고 있잖아. 너 하나 구하겠다고. 조용히 살면서 자기 할 일이나 하면 될 것을, 너 때문에 온 숲의 생명력을 대가로 쓰고 있잖아. 모르겠어? 어차피 그분의 계획 앞에서는 모두 헛된 것일 텐데.”

 “나를… 구한다고….”

 “그니까 물어봐. 진실에 대한 답을.”

 “…….”

 “네가 답을 알게 되는 날, 날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다시 보자구.”

 깔깔거리는 웃음을 남긴 채로, 힐라의 모습이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한순간에 너무 많은 정보가 데미안의 뇌에 충격을 준 터라, 데미안은 땅에 박힌 듯이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알리샤가 살아있다니. 꿈에서나 일어날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게 사실이라면…. 데미안의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내용으로 마구 휘돌았다. 무슨 생각을 먼저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겨우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데미안은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창밖은 깜깜했고 집안은 고요했다. 벽을 더듬어 전등을 키자 채 정리되지 않은 어지러운 식탁이 눈에 띄었다. 대충 한쪽으로 그릇들을 쌓아두고 부싯돌로 불을 피운 데미안이 찬장을 열었다. 며칠 전 집 앞에서 딴 이름 모를 노란 열매들이 봉긋하게 쌓여있었다. 막 땄을 때는 금색의 샛노란 빛을 내던 열매들이 조금은 어두운 노란 빛이 되어있었지만 데미안은 상관하지 않았다. 대략 열매 한 줌을 쥔 데미안이 막 물을 부은 놋 주전자에 노란 열매를 털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수로 물어보라는 거야.”

 세계수 사건 이후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마음에 꾹꾹 눌러 담고 살고 있었는데….

 보글보글 놋 주전자가 끓기 시작하자 데미안이 주전자의 뚜껑을 열었다. 뽀그르르 올라오는 기포와 함께 물속을 휘도는 노란 열매를 데미안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열매인지는 모르나, 집 앞에 기절했을 때 본능적으로 입에 가져가면서 처음 먹게 된 열매였다. 향이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뒷맛이 남는 노란 열매는 그 이후로 가끔 끼니를 챙겨야한다는 생각이 들면 밥 대신 집어 먹거나 끓여 먹으며 기운을 차리는 나름의 주식이기도 했다.

 주전자를 식탁에 옮긴 후 열매 달인 물을 컵에 부은 데미안이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데미안이 차분히 컵을 입에 가져다 대며 힐라의 말을 곱씹었다. 

 “알리샤에게 물어보라고? 알리샤는 죽었는데… 살아있다고?”

 기억을 확실히 해보자면, 알리샤의 마지막 음성을 들은 건 세계수 정상이 아니었다. 제일 처음에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알리샤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작은 속삭임이 이어지다가 알리샤는 마지막에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너는 죽지 않았어….

 단지 몸이 좋지 않아서 혼자 환청에 시달렸다고만 생각했는데, 힐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진정 알리샤의 음성일 수도 있었다. 그리운 사람, 그리운 목소리. 데미안이 차분히 두 눈을 감았다.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싼 컵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당연하게도 알리샤가 떠올렸다. 깨면서 제일 처음 들었던 음성. 환청이었을 거라고 자책하며 부정하려고 했던 음성.

 “내 모습을….”

 “…뭐라고?”

 막 알리샤의 속삭임을 떠올리려고 했을 때 불현듯 목소리가 들렸다. 번뜩 눈을 뜬 데미안이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내 모습을 따라가지 말아줘…”

 분명 알리샤의 목소리였다. 소리의 근원이 어딘지 방향을 특정할 수 없었지만, 분명 알리샤의 음성이었다.

 “알리샤?”

 “제발….”

 제발, 이라는 말과 함께 더 이상 알리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적막이 흐르는 집안을 데미안이 벌떡 일어나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고 언제나처럼 혼자인 것만을 깨달을 뿐이었다.

 “알리샤….”

 떨리는 음성으로 알리샤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을 다 정리하지도 못 했는데.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다리에 힘이 풀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데미안이 앞으로 몸을 웅크렸다. 식은 찻잔의 찬 감촉만이 무엇보다도 선명했다. 한참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데미안이 여태 묻어두었던 수 만 개의 문장 중 한 문장을 짧게 내뱉었다.

 “보고 싶어.”




 “그래 너였어. 내가 쓰러지기 전에 본 실루엣… 힐라가 아니라 너였어.”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에, 치렁치렁한 녹빛 치맛자락. 꿈속에서조차도 그리워했던, 그런 뒷모습. 당장에라도 불러 세워 고개를 돌리면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알리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말없이 앞서서 걷고 있는 뒷모습을 불러 세우면 저 멀리 사라질 것 같은 막연한 걱정이 문득 앞섰다. 그렇게 홀린 듯 따라 가는데, 푸른 숲길이 끝나고 황무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온통 암석 천지에 풀 한 포기 보이질 않는 적막한 공간으로 들어서자 바닥에 들쑥날쑥 박혀있는 이상한 막대들이 보였다. 몇몇은 금속으로 만들어졌고, 몇몇은 나무로 만들어진 막대들은 규칙성 없이 마구 바닥에 박혀있었다.

 “이렇게 쉬울 줄이야. 진작 데려올 걸 그랬네.”

 앞서 가던 알리샤가 멈춰서더니 다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데미안이 알리샤와 한 걸음 간격을 유지한 채로 멈춰 섰다. 펄럭이는 알리샤의 치맛자락 너머로 익숙한 붉은 자락이 보였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데미안이 다가가 허리를 숙여 붉은 목도리에 손을 뻗었다. 십자(十) 모양을 한 철제 막대가 땅에 박혀있었는데, 막대 위로 익숙한 목도리가 걸려있었다. 습관처럼 하고 다니던 목도리가 이런 먼지 바닥에 있다니. 데미안이 얼른 먼지를 털고 다시 걸칠 요량으로 목도리를 풀어내는데, 알리샤가 그런 데미안을 내려다보며 간드러지게 말했다.

 “이런, 망자의 물품엔 손을 대는 게 아니지, 데미안. 설령 네 것이라도 네 형을 생각해서라도 내려놓는 게 좋지 않을까? 없어지면 슬퍼할 테니까.”

 “망…자…?”

 ‘망자’라는 단어를 뱉는 알리샤의 비릿한 미소가 이상한 것을 깨달은 데미안이 주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예전에 마주했을 때와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너… 알리샤가 아니지.”

 “여기까지 와서야 알아채다니, 예전 총기도 같이 죽은 모양이네.”

 알리샤의 금빛 머리칼 끝이 붉게 물들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녹빛 치맛자락은 서서히 사라졌고, 딱 다리에 달라붙은 검정색 실루엣만이 선명했다. 텅 비어있던 맨손엔 커다란 낫이 쥐어졌고 곧 온전한 힐라의 모습만이 데미안을 마주했다.

 “힐…라….”

 데미안이 잡고 있던 목도리 한쪽이 땅으로 떨어졌다. 집에서 언뜻 들었던, 따라가지 말라고 했던 소리가 단순히 환청은 아닌 모양이었다.

 “알리샤가… 따라가지 말라고… 그게….”

 “‘진짜’ 알리샤 말을 들었어야지.”

 “알리샤는 죽었잖아. 죽었다고 그랬어. 사람들이….”

 “내가 그랬잖아. 죽은 건 알리샤가 아니지.”

 “….”

 “죽은 건 바로 너지, 데미안.”

 또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완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힐라는 너무나도 뻔뻔히 하고 있었다.

 “내가 죽어? 죽긴 누가 죽어. 이렇게 살아있는데. 헛소리할 거면 집어 치워.”

 데미안이 매몰차게 몸을 돌려 힐라 앞을 뜨려는데, 힐라의 음성이 그런 데미안을 붙잡았다.

 “이건 보고 가야지. 이것 때문에 데려온 건데.”

 힐라가 허공에 낫을 휘두르자 철제 막대가 넘어지며 돌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우르르 무너졌다. 힐라가 무너진 돌들을 손가락 하나만을 까딱해서 옆으로 치우자 밑으로 나무 관이 보였다. 아주 익숙한 손놀림으로 관뚜껑을 연 힐라는 데미안이 보기 쉽도록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소개했다.

 “어머, 여기 네가 있네.”

 관 안에 누워있는 상대는 누가 보아도 데미안이었다. 옷에 흠뻑 묻어 말라있는 핏자국과는 다르게, 피부는 묻어있던 핏자국들을 닦아냈는지 말끔했고, 무표정한 얼굴과 가지런히 놓인 손발엔 간간히 상처와 피딱지가 보였다.

 “이제 받아들이렴. 죽은 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거야말로 이 세상의 이치니 말이야.”

 “아니야… 아니야….”

 데미안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뒷걸음질 쳤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 주변을 살필 것도 없이 뛰던 데미안이 가쁜 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또 다시 숲속이었다.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정처 없이 방황하던 데미안이 풀썩 주저앉았다. 눈앞이 휘돌았다. 까무룩 또 한 번 데미안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또 얼마나 쓰러져있던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이젠 이렇게 쓰러지는 것도 그만하고 싶은데, 몸은 그러질 못 했다. 겨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세계수 사건 때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아까 그 모습 그대로. 빨간 망토에 연두색 치마 차림의 알리샤가 데미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힐라!”

 눈앞에 앉아있는 알리샤가 황무지에서의 힐라일 거라는 의심에 데미안이 펄떡 일어나 앉았다.

 “힐라는 널 따라오지 않았어.”

 “안 따라왔다고?”

 “응.”

 “…아까부터 날 보고 있었군.”

 “항상 그랬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살펴보자니, 알리샤는 아까처럼 비릿한 웃음을 짓지도, 낯선 기운을 뿜지도 않았다. 익숙한 모습은 늘 그리워했던 그 모습이었다.

 “너… 정말 살아있었구나.”

 알리샤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다는 힐라의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근데 왜 이제야… 이제야 나타난 거야.”

 데미안의 볼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툭, 떨어졌다. 눈물을 보일 생각은 없었는데, 갑자기 울컥 차오르는 감정은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살아 있었으면서 어째서 이제야 모습을 보이는 건지, 괜히 원망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온 세상에 육체를 흩뿌린 이후부터 이렇게 영혼이나마 잠시 형체를 이루는 것도 나에겐 많은 힘을 필요로 해.”

 “….”

 “형체를 이룰만한 힘이 없을 땐 겨우 목소리만 전했지.”

 “그래서 들린 거구나. 네 목소리가.”

 “그리고….”

 알리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는 듯 입술을 깨물며 주저했다. 데미안과 눈을 맞추지 못한 채 잠시 방황한 알리샤의 시선이 곧 다짐이라도 한 듯 의연하게 데미안을 마주했다.

 “처음부터 내가 너에게 거짓말을 했으니까. 그래서, 나타날 수가 없었어.”

 거짓말을 했다는 알리샤의 얼굴에는 미안한 감정보단 슬픈 감정이 앞선 듯 보였다. 말없이 알리샤를 바라보는 데미안을 향해 알리샤가 말을 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네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어. 한 번 거짓말을 했으니 계속 거짓말을 해야할 테니까. 또… 조금이라도 내가 거짓말을 한 걸 네가 알게 될까봐 그랬어.”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데. 살아있다고 한 마디 안부도 못 전할 정도로, 그렇게까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데.”

“….”

 “그럼 지금은 뭔데. 지금은 거짓말 할 자신이 있어서 이렇게 나타난 거야? 그럼 거짓말 했다고 얘기할 건 또 뭔데.”

 “이젠 모습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참으로 이상했다. 뭘 숨긴다는 건지. 그리고 왜 조금도 반가운 표정이 아니라 슬픈 표정인 건지. 알리샤의 표정을 읽으며 막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집요하게 스쳐가는 풍경이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난 안 죽었어. 그렇지?”

 황무지에서 본 건 그저 지독한 악몽이었을 뿐이라고, 알리샤가 거짓말을 한 건 다른 것 때문일 거라고.

 “….”

 “날 계속 보고 있었으면 알 거 아냐. 대답해 줘.”

 “…….”

 데미안이 그러했던 것처럼, 알리샤의 두 눈에서 투툭 두 줄기 눈물이 떨어졌다. 데미안은 자신의 예상이 맞아 들어가는 것만 같아서 참담해지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왜 대답을 못 하는 건데.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들었어. 나 살아있다고. 네가 그랬던 거 아니야? 나 안 죽었다고. 근데 이젠 내가 죽었대. 그리고 누워있던 나를 봤어. 진실을 말해줘 제발.”

 “…말할 수가 없었어.”

 “죽으면 죽었다고 하면 되잖아. 왜 거짓말까지 하면서 날 속였어야하는 건데.”

 “차라리 속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 죽음을 인지 못 하고 내 말에 속은 채로 지내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었어.”

 죽음을 인지하는 것…. 알리샤의 말대로라면 황무지에서 힐라가 보여줬던 모습은 꾸며낸 허상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란 말이었다.

 “내가 살아있다고… 여태 착각을 한 거야 그럼?”

 “…….”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 가면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던 상황이. 며칠이고 공복이어도 문제  없이 돌아다니던 상황이. 힐라가 했던 허무맹랑한 소리들이.

 단지 못난 놈으로 찍혀서 대답해주지 않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저 굶주림에 익숙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단순히 놀리기 위해 지어낸 말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네가 무덤을 보고 왔고 네 스스로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한 이상, 내가 했던 거짓말을 거둬야하니까.”

 “그런 게 지금 와서 꼭 필요해?”

 “지금 상태에서 네 스스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실히 하지 못하면, 혼란 속에서 영원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떠돌아야 해. 그건 불행한 일이니까 그렇게 되도록 할 수는 없었어.”

 불행한 일…. 따지고 보자면 불행한 사건으로만 가득했던 인생이었다. 그런 인생이 더 불행해질 수 있을까.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의미 없는 생각만이 잠깐 일었다 사라졌다.

 “처음부터 내가 죽었다고 말했으면, 살아있다고 속삭이지 않았다면! 그냥 내가 죽은 거 알게 해줬으면 이렇게 거짓말할 필요까진 없었을 거 아냐. 내가 괘씸해서, 그렇게 헤매고 다니는 게 보기 좋았던 건 아니고?”

 “그런 게 아니야!”

 둘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잠시 주변 공기가 흔들렸다. 마주하는 서로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고, 볼을 타고 흐른 눈물들은 옷에 떨어져 불규칙한 원들을 그리고 있었다.

 “그럼 뭔데. 난 반쯤 미쳐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온몸에 나무에 긁힌 상처가 가득하도록 돌아다녔어. 죽은 줄도 모르고 멀쩡히 산 사람 마냥 돌아다닌 거잖아. 그저 비참하게… 비참하게 죽어간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미 죽었던 거잖아, 나는.”

 “네가 죽음을 깨달아서 끌려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

 알리샤가 두 손으로 치마를 꽉 쥐며 말을 이었다.

 “깨닫는 순간 넌 사령으로 끌려가게 될 테니까.”

 “뭐?”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괘씸해서, 그저 장난이 좀 과해서 정도의 답을 원했던 건데.

 “네가 또 검은 마법사에게 끌려 다닐까봐 싫었어. 차라리 죽었다는 걸 깨닫는 것보다,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최소한 사령으로 끌려가진 않을 테니까.”

 “….”

 “원치 않게 복종해야 될 네 모습을 보게 될까봐 싫었어. 네가 그렇게 끔찍하게 여기던 짓을 또 하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어.”

 “….”

 “힐라와 검은 마법사가 원한 건 그거였으니까.”

 “검은 마법사….”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힘을 잃었으니 어찌 보면 쓸모를 다한 군단장일 테니까. 그래서 그저 과거 이야기에만 그칠 거라고 생각했던 둘의 이름이 알리샤의 입에서 나오니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울먹임이 섞인 대화가 잠잠해지고 푹 고개를 숙이고 있던 데미안이 무엇인가가 떠오른 듯 말했다.

 “힐라가 그랬어. 네가 나 때문에 생명력을 대가로 쓰고 있다고. 그럼 그것도 사실이야?”

 “어쩔 수 없었어.”

 “왜 자꾸 네 힘을 나 때문에 써야하는 건데. 왜 내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네 힘을 앗아가는 존재가 돼야하는 건데. 왜….”

 괴로웠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나 나 때문에 형은 어릴 적부터 피를 보고 다녀야했고,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야했다. 그리고 나 때문에 세상은 멸망 직전까지 갔었고, 나 때문에… 알리샤는 또 다시 힘을 잃고 약해지고 있었다.

 막 그친 줄만 알았던 울음이 기어코 또 삐져나왔다. 때문에 채 말을 끝맺지 못한 데미안을 바라보던 알리샤가 차분히 대답했다.

 “너 때문에 한 줌 남은 힘이나마 내 힘을 쓰고 있는 것도 맞아.”

 “….”

 “너 때문에 내가 또 다시 약해지고 있는 거, 부정할 수 없겠지.”

 “…….”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단지 너 하나만 구하기 위해서는 아니야.”

 “그럼 뭔데.”

 “작게는 너를 구하는 일이지만, 크게는….”

 “….”

 “전처럼 실패하지 않고 세계를 지키는 일이야.”

 “실패….”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장면들이 있었다. 파멸을 각오하고 목숨을 걸었던 순간들이. 옳지 못한 일들인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저 해야만 하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했던 일들이었다. 수많은 잘못된 선택들로 말미암아 결과는 지금과 같았다.

 “나는 너를 막지 못 했고, 결국 내 전부를 대가로 치러야했어.”

 “….”

 “찰나의 감정을 휘어잡지 못 했던 내 실수, 그리고 너를 붙잡지 못한 내 실수. 그래서 받아든 실패지.”

 슬프게 웃어보이는 알리샤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애달팠다. 알리샤는 또 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부러 막지 않았다. 윗니로 꽉 깨문 아랫입술이 어느 때보다도 아렸다.

 “어차피 난 죽었잖아. 이제 손 놔. 사령으로 끌려가는 건 내 몫이니까. 나 같은 놈 네가 신경 쓸 이유… 없잖아.”

 누군가가 희생해야 하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볼 자신이 없었다.

 “그만 해도 돼. 애쓸 필요 없어.”

 “왜 없어.”

 알리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산한 기운이 주변을 감돌더니 데미안의 등 뒤로 힐라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래. 어차피 넌 죽었으니까, 데미안.”

 알리샤가 힐라를 올려다보았다. 힐라는 마음이 찬 듯 보였다. 데미안은 애써 도망치지 않겠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그만하는 거야.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만… 그만하자 이제.”

 “그만 하자고…?”

 알리샤가 엉거주춤 땅을 짚고 일어섰다. 채 몸에 중심이 잡히지 않는 듯 잠시 휘청거린 알리샤를 향해 데미안이 손을 뻗는가 싶더니 도로 멈추었다.

 “원래부터 우리는 다른 곳에 서있었잖아. 지금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원래 그래야 했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거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나는 원래 군단장이었고, 너는 그런 군단장을 수하로 두고 있는 검은 마법사로부터 세상을 지키려던 초월자였잖아.”

 “탁월한 생각이야 데미안.”

 힐라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데미안은 잠시 할 말을 생각하더니 마음을 정한 듯 차분히 알리샤를 향해 말을 전했다.

 “나 때문에 네가 약해지는 거, 내가 보기가 싫어서 그래. 사령으로 끌려가는 건 나의 몫이니까. 내가 짊어질 테니까 넌… 넌….”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네가 모셔야 할 주인으로서 명하노니, 삼가 명령을 받들도록.”

 날카롭게 벼린 낫날을 데미안의 목에 가져다 댄 힐라가 알리샤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짧은 순간이지만 반가웠어, 세계수.”

 “힐라.”

 애써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며 알리샤가 담담히 힐라의 이름을 불렀다.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힐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이 아이는 내가 잘 거둘 테니… 세계수는 해야 할 일이나 하지 그래? 온전히 힘을 회복하지 못한 생명의 초월자라도, ‘아직까진’ 세상에 필요할 테니 말이야.”

 불쾌한 기운이 발목을 휘감으며 점차 위로 올라오는 기분을 떨쳐내고자 데미안은 움직이려했지만, 정신이 점차 흐려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아이를 놔줘. 그렇지 않으면 대가를 치러야할 거야. 세상의 이치를 거스른 대가는 참혹할 테지.”

 결연한 표정의 알리샤가 힐라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하지만 힐라는 알리샤의 말을 모조리 비웃듯 대답했다.

 “얼마든지 참혹하라고 그래. 그분이 여실 새 세상 앞에서 어느 대가가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제 난 그분의 세계에서 선택 받은 자로 영원불멸의 삶을 누릴 텐데 말이야.”

 “….”

 “세계수는 이제 그만 빠져줬으면 하는데. 자꾸 그렇게 모습을 보이니까 쓸데없이 힘이 약해지는 거,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 안 그래?”

 “그건 네가 참견할 게 아니야.”

 “그래. 참견할 생각은 없어. 왜냐면 나는 바쁜 몸이니까. 세계수가 당장 눈앞에서 사라질 생각이 없다면, 내가 대신 사라져주지.” 

 주변을 뒤덮는 한바탕 바람과 함께, 힐라와 데미안의 모습이 사라졌다. 바람이 잠잠해진 숲속에 알리샤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단지 슬퍼서 눈물이 나는 것만은 아닐 거라고. 잠시 일었던 바람에 눈에 흙이 들어가서 눈물이 나는 것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너무 오래 형체를 이루고 있던 모양인지 점점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차차 허공으로 옅어지는 알리샤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 처연했다.




 스멀스멀 온몸을 타고 오르던 기운은 이내 몸 전체에 피어오르더니 온몸을 이끼색으로 물들였다. 커헉, 짧은 소리를 내며 데미안은 가슴팍을 붙잡고 쓰러졌지만 힐라는 그런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한 구석 빠지는 곳 없이 몸 전체가 불쾌한 기운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손목과 목 부분을 아무리 짚어도 맥박은 잡히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돌벽에 살이 긁혀도 흉한 흉터만 남을 뿐 피 한 방울 맺히지 않았다. 습관처럼 하던 목도리가 없는 목은 어느 때보다도 휑했다. 끌려온 이후로 정신은 무언가에 취하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어지러웠다. 미리부터 와있던 스우 또한 같은 처지인 건지 온통 이끼색을 뒤집어 쓴 채 데미안 옆에 멀찍이 서있었다. 

 힐라는 미궁의 깊은 지하를 그렇게 불렀다. 죽음의 밑바닥이라고. 한 줄기 빛도 없고, 퀴퀴한 냄새만이 가득한 그곳에 사령으로 끌고 온 스우와 데미안을 가둬놓곤 대적자를 골릴 용의로 시시때때로 둘을 지하로부터 불러올리곤 했다.


 잠깐 여유가 난 모양인지 깊은 지하로 내려온 힐라는 돌로 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힐라가 의자에 앉아서 내려다보든 말든 데미안은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미안을 향해 낫을 들이민 힐라가 낫등으로 데미안의 턱을 건드리며 말했다.

 “이미 흩어져 전보다 못한 힘이나마 탐이 나는 거야? 아직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알리샤의 힘, 그거라도 있으면 다시 전으로 조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을까봐? 꿈 깨. 몇 번을 말해줘야 알아들을까? 넌 내가 부리는 사령에 불과하다는 걸?”

 살았다고 하기엔 분명 죽은 것에 가까웠고, 죽고자 해도 죽지 못 하는 괴상한 존재였다. 힐라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하는 이상한 상태이자, 의지를 가져도 힐라의 말 한 마디에 좌절되는 존재였다.

 “내가 부리는 사령이 됐으면 최소한 나에게 예의는 지켜야하지 않을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분노에 찬 눈을 희번뜩이는 데미안의 입가에서 조소가 터져 나왔다. 데미안이 불쑥 고개를 돌려 힐라를 노려보았다. 머지않아 힐라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입꼬리의 주인이 자신의 몸집만한 낫에 박혀있는 구슬 을 어루만졌다. 구슬이 잠깐 붉은 빛으로 빛나자 데미안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모양새로 펄썩 바닥에 엎어졌다.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그 잘나고 빳빳한 목도 수그릴 줄 알아야지. 언제까지고 버릇없이 굴 참이지?”

 “죽여 버릴 거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위에서 누르는 것만 같았다. 한쪽 볼이 바닥에 닿아 눌리는 와중에도 아득바득 말을 뱉어내는 데미안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분께도 예의 없던 너를 단박에 이렇게 내 앞에 굽히게 했으니.”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몸이 쉬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한참 사투를 벌이던 데미안의 움직임이 차차 둔해졌다. 그런 데미안을 사늘하게 내려다보던 힐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여기 얌전히 있어. 나는 대적자랑 즐거운 만남을 갖고 올 테니까.”

 힐라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킨 데미안이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전과 같았으면 피라도 맺혀있었을 텐데, 돌바닥에 쓸려 파인 흔적만이 그대로 느껴졌다.

 “편안해지고 싶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 같았다. 어쩌면 영영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사령으로 끌려온 뒤로 하루도 빠짐없이 끔찍한 나날들은 영원할 것만 같았고, 평화로운 안식은 꿈도 꿀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제발… 그만하고 싶다고.”

 데미안의 허탈한 목소리만이 지하에 왕왕 울렸다. 












어리석은 시간이 흐르고

지친 내 영혼이 너를 찾아갔을 때

그리도 서글픈 얼굴로 내 두 손을 잡은 채 말했지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늦어버렸다고 이제


김동률 – 다시 떠나보내다












  또 환상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깜빡이는 시야 사이사이로 빛이 생겼다 사라지는 건. 어두컴컴한 미궁 지하에서 빛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불쾌한 빛깔의 액체들뿐인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구석에 처박혀있던 데미안이 몸을 똑바로 세우고 눈을 뜨자, 저 멀리서 은은한 금빛의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라가 스우를 데리고 대적자를 농락하고 있을 테니 일단 그 둘은 아닐 터였다. 은은한 무언가는 빛 같기도 했고 형용할 수 없는 기운 같기도 했다.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기에, 데미안이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알…리샤?”

 앞에 선 무언가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여기서 만날 거라곤 생각도 안 해봤는데.

 “왜 왔어.”

 무뚝뚝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뱉고도 아차, 싶은 말이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다. 언젠가 봤던 자애로운 표정의 알리샤가 앞에 떠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죽음만이 머무는 스산한 곳이라 그런 건지 생명 그 자체일 알리샤는 그 무엇보다도 빛나 보였다. 어둠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여태 본 무엇보다도 밝았다.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 한 줄이 구원이 깃든 것만 같았다.

 “그때처럼-”

 “….”

 “네가 걱정 돼서.”

 다른 이유는 없었다. 데미안이 숲을 방황하다 정신을 잃었을 때처럼 걱정이 되어 찾아온 것뿐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조금 남은 힘이나마 형체를 이뤄 데미안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곁에 있곤 했으니까.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대가로 쓰는 일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데미안이 아예 깨어나지 못할까봐 걱정이 앞서 그랬던 것도 있었다.

 “지금 힐라가 가진 힘은 나의 힘과 반대돼. 이곳도, 내 앞에 서있는 너도 그래. 아마 오래 있지는 못 할 거야.”

 미궁에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평상시에 형체를 이루는 것보다 더욱 많은 힘을 필요로 했다. 자칫 잘못하면 스스로가 위험해질 수 있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상하는 거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조금만 네 얼굴 보고 가면 안 될까?”

 “….”

 “보고 싶었어서 그래.”

 알리샤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데미안과 눈높이를 맞췄다. 사령 노릇을 하며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인지 성해보이는 구석이 없었다.

 “왜 이렇게 흉터가 많이 생겼어.”

 무슨 일을 겪었을지 짐작이 갔지만 알리샤는 다만 데미안의 앞머리를 쓸어주고는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말없이 알리샤의 새하얀 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

 “나도 보고… 싶었어.”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진 건지 모를 일이었다. 데미안이 벽에 대충 기댔던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아 알리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와줘서 너무… 너무 고마워.”

 당장에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데 알리샤가 쓰러지지 않게 붙잡아 주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초월석을 찾아 헤매던 그때처럼.

 “만나서 너무 좋다.”

 알리샤가 빙긋 웃어 보였다.

 “나 때문에 이미 많은 걸 잃은 네가, 더 이상 나 때문에 쇠약해지거나 무언가를 더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

 “차라리 내가 사령으로 남으면 남았지.”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은 걸.”

 수많은 세월을 살며, 제한된 수명을 살아가는 존재들과 이별하는 게 매우 당연한 일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늘 헤어지는 것은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홀로 있으면서 별 생각을 다 해봤어. 혹시 사령으로 충성스럽게 지낸다면 검은 마법사가 새 세상에서 내게 육신을 줄 수 있을 지는 않을지. 내가 너무 못나서… 말도 안 되는 거에도 희망을 갖고 미련을 가지는 것 같은데, 어쩔 수가 없었어. 너무 힘들어서, 끌려 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자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돼.”

 “데미안….”

 “그만하고 싶어. 이 짓을 정말 그만하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초월석을 찾고 영웅들을 상대해야 했을 때도, 데미안이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던 말들이었다. 매일 붕대를 갈아야 할 정도로 몸이 성치 않을 때도 힘든 내색 한 번 한 적 없던 아이였는데. 지금 앞에 앉아 있는 데미안은 온몸이 부서지도록 절규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눈물들이 동그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또 힐라가 나를 불러올릴 거야. 이 운명을… 벗어나고 싶어. 자유로워지고 싶어.”

 “…나는 더 이상 검은 마법사를 막아낼 수 있는 힘이 없어.”

 알리샤의 대답이 어느 때보다도 담담했다. 그래도 데미안은 절박하게 알리샤를 마주보았다. 방법을 알려달라고. 뭐라도 좋으니 답을 알려달라고. 데미안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간절했다.


 “…그럼, 힐라가 패배해야겠지.”

 어찌 보면 제일 당연한 해답일 테지만, 지금 상황에선 막막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다. 곧장 달려가 칼을 휘두른들, 힐라는 낫에 박힌 구슬을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고통에 몸서리치게 만들 테니까. 어쩌면 낫을 휘둘러 직접 피해를 입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힐라가 가진 힘이 소멸하는 제일 확실한 방법은, 힐라가 죽는 거겠지. 그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데미안은 알리샤가 뱉을 문장이 예상이 가면서도 아니길 바랐다. 예상이 맞다면, 그것은 힐라를 쓰러뜨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테니까. 어쩌면 불가능한 일 그 자체일 테고,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표현일 것이었다.

 “…검은 마법사가 죽어야겠지.”

 “결국 그런 거군.”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결국은 이렇게 끝없는 고통의 사슬에 속박되어 힐라의 꼭두각시로 살아야할 운명이라니. 목 끝까지 차오르는 비명을 내지르며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령으로 남아있는 건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어. 대적자가 이기는 걸 바라고, 또 바랄 수밖에.”

 봉인석을 품은 대적자의 승리- 혼돈의 세계에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데미안이 안식을 찾기 위해서라도.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뻔했다. 대적자가 승리를 거머쥐기엔 상대는 너무나도 강력한, 대적할 자가 없는 검은 마법사였다.

 “대적자라….”

 부질없는 희망을 걸 곳이 없어서 대적자 녀석한테 희망을 걸어야한다니. 루타비스에서 수하로 둔 봉인의 수호자들을 처치하고 알리샤를 빼돌려 한바탕 귀찮은 일을 하게한 그 녀석의 승리를 바라야 한다니. 마족의 승부 근성이 남아있는 데미안에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힐라에게 놀아나는 둘도 없는 멍청이와 다름이 없는데, 어떻게 검은 마법사에게 일말의 피해를 입힐 수 있을지 한숨만 나왔다.

 “바보 같이 방황 밖에 할 줄 모르는 놈한테 기대를 걸라고? 날 몇 번이나 베고도 또 길을 헤매고, 스우를 베고도 헤매고. 멍청하게 아잘린 흉내를 내는 힐라한테나 놀아나고. 희망을 그런 놈한테 걸어야만 하다니, 너무 비참해지잖아.”

 알리샤가 몸을 숙여 말없이 데미안을 꼭 안아주었다. 무슨 말로도, 어떤 행동으로도 위로를 전할 수는 없을 테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었다. 가만히 데미안의 등을 쓸어주며 알리샤가 속삭였다.

 “내가 대적자에게 힘을 보탤게. 메이플 월드 주민들과 함께 도울게. 이 세계를 위해서-”

 “….”

 “너를 위해서….”

 데미안도 양팔로 알리샤를 끌어안았다. 예전에 이렇게 안았을 때는 심장이 뛰는 소리가, 옷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이 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눌 수 없는 것들이었다.

 “…힐라가 나를 부르고 있어.”

 고개를 파묻고 있던 데미안이 알리샤를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헤어져야만 할 시간이었다. 알리샤가 차분히 데미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보고 싶을 거야. 아주 많이.”






 “설마 헛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그분의 새 세상에 네 몫은 없어. 그분과 약조한 건 오롯이 나 하나니까. 스우 몫? 당연히 없지.”

 “….”

 검은 마법사가 머무는 공간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원래도 별로 오고 싶은 곳은 아니었는데, 사령이 된 후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허튼 짓 할 생각이면 포기하는 게 좋아. 은혜도 모르는 채로 날뛰는 꼴을 난 봐줄 생각이 없거든. 예전처럼 건방지게 굴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은혜 좋아하네.”

 사령으로 부리는 걸 은혜로 치부하다니. 이기적인 말을 힐라는 스스럼없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힐라는 그것을 진정 은혜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 말버릇부터 고쳐. 언제까지고 내가 봐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 위대한 분이시여.”

 방금까지 데미안을 당장이라도 파묻을 기세로 일갈하던 힐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막 모습을 보인 검은 마법사를 우러러보는 힐라의 눈빛은 마치 황홀경에 빠진 사람 같았다. 검은 마법사의 음성과 눈빛 그리고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착 어린 힐라의 태도를, 데미안은 속으로 힘껏 비웃었다. 검은 마법사는 힐라 뒤에 서있는 두 사령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듯 보였다.

 예언의 날이 다가왔다며 검은 마법사의 지령을 받아든 힐라는 한껏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는 사령 둘과 함께 검은 마법사가 머무는 곳을 빠져 나왔다.






 또 대적자와의 전투였다. 이게 몇 번째인지. 계속 골리는 게 지겨울 법도 한데, 힐라는 여전히 재밌는 모양이었다. 대충 칼을 휘두르다가 격파당하고 지하로 끌려 내려온 데미안이 힐라는 끝끝내 마음에 차지 않는 듯 허름하게 서있는 데미안을 쏘아보았다.

 “성의가 없어. 제대로 하지 못 해?”

 대꾸를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데미안이, 순간 힐라를 향해 칼로 사선을 그었다. 그것쯤은 미리 간파한 듯, 힐라는 아주 가볍게 몸을 피했고 오히려 낫자루로 데미안의 오금을 쳐 주저앉혔다. 데미안이 짤막하게 윽, 소리를 내며 꼬꾸라졌다.

 “네 주인은 나라는 걸 명심해. 한 번만 더 불손하게 굴면 더 험한 꼴을 보게 될 거야.”  

 또 한 번 데미안이 돌바닥에 엎어졌다. 저 멀리 미궁 지하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힐라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대로 까무룩 잠들어서 영원히 깨지 않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잠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과거의 기억들이 물밀듯 흘러들어 왔다. 붉은 목도리를 전해주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같이 불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전술을 연구하는 봉인의 수호자 4인방의 모습이 보였다. 승리를 자신하며 대지가 흔들릴 정도로 환호하는 마족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붕대로 온몸을 칭칭 감는데 말없이 매듭을 지어주는 알리샤의 모습이 보였다.




 함께 머문 추억이 더 많은 막사였다. 이제 이 풍경도 오늘로써 마지막이 될 예정이었다. 불을 피워놓은 자리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던 알리샤가 차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든 게 늦어버렸어.”

 “아니, 난 시작도 안 했어.”

 손 안에 초월석을 넣었고, 이제 힘을 탈취하는 일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원하는 바를 이루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긴 시간을 함께 한 알리샤라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초를 치는 소리는 용서할 수 없었다.

 “틀렸어. 돌이키지 못 할 거야.”

 어느 때보다도 알리샤의 목소리가 엄숙했다.

 “아직도 할 파멸 타령이 남아있나? 그래?”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는 소리는 지겹도록 들었었다. 어차피 그 정도는 알고 있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기에 쓸데없는 걱정을 해줄 필요는 없다고 늘 받아친 참이었다.

 한때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와 말없이 안고만 있었던 시간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아서,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공포가 두려워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옷을 사이에 두고 피부에서 피부로 전해지는 온기를, 떨림을 묵묵히 나누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건 다 옛일이 되었을 뿐이었다.

 “초월석은 모든 걸 되돌려줄 거야.”




 이 죄들을 씻을 길 있을까. 양손이 붉게 물들도록 피를 묻힌 죄가 너무나도 커서, 구원을 바라는 건 너무나도 이기적인 걸까.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평안과 안식이라는 걸 누릴 자격이 없는 건 아닐까. 과거의 기억이 잠식한 꿈은 곧 악몽으로 변했다.




 점차 시야가 선명해졌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거무죽죽한 미궁 지하의 풍경이었지만, 언제 악몽에 시달렸냐는 듯 몸은 개운했고 정신은 맑았다.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다듬는데 마치 알리샤가 곁에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빈 바닥을 매만지는 데미안의 손길이 쓸쓸했다.












지나 보면 보잘 것도 없는 작은 꿈에 들떠 있을 때도

넌 그리도 서늘한 얼굴로 꾸짖어 주곤 했지

그래선 안 된다고



김동률 – 다시 떠나보내다












  빙빙 미궁를 돌던 대적자라는 녀석은 어떻게 결국 길을 찾은 모양인지 욕망의 제단을 들이쳤다. 미궁 안에서 비실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제대로 칼을 빼든 대적자는 당당히 힐라를 대적했다. 힐라가 미궁 깊숙한 지하에서 스우와 데미안을 불러올리는 것도 잠시, 대적자는 쉽게 그 둘을 행동불능으로 만들었다. 데미안은 오히려 그렇게 만들어준 게 고마웠다. 다시 지하 깊숙한 밑바닥으로 떨어질 테지만, 싸움판에서 힐라의 뜻대로 칼을 휘두르는 것보단 훨씬 나았으니까.

 도로 지하에 떨어진 후 겨우 숨을 돌리고 있는데, 평상시와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평상시대로라면 한껏 대적자를 비웃는 힐라의 목소리가 들려야할 텐데, 위쪽에서 찢어질 듯 높은 힐라의 비명이 들렸다. 여태와 다른 양상에 번쩍 몸을 일으킨 데미안의 머리 위로 힐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젊음이… 아름다움이! 안 돼!”

 이후로 미궁은 적막에 잠겼다. 대적자는 힐라를 쓰러뜨리고 서둘러 미궁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힐라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고, 데미안은 자신을 잡아끄는 기분 나쁜 느낌도 더 이상 들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점차 온몸을 물들였던 이끼색이 옅어지며 본래의 피부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힐라가 패배함으로써 완전하지는 않지만 사령으로서의 속박이 어느 정도 풀린 모양이었다.

 곧 미궁이 사라지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배경이 주위를 감쌌다. 주변이 온통 파란 빛으로 넘실되는 신비로운 곳이었다. 아마도 소문으로만 듣던 ‘세계의 눈물’ 이라는 곳 한복판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저 멀리 익숙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보였다. 딱봐도 연합원들이 분명했다.

 가야할 곳이 있었다. 만나야 할 존재가 있었다. 어딘지 방향을 정하지 않고 마구 달리다보면 만날 수 있을 거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었다. 알리샤는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을 테니까. 

 정처 없이 마구 떠도는 발길이 급했다. 문득 불안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엔가 사령으로 끌려갔던, 알리샤를 재회했던 숲속에 들어와있었다. 데미안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알리샤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좀 걸을래?”

 숲속에서 차차 모습을 드러낸 알리샤가 손을 건네며 물었다. 데미안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방이 막히고 답답한 미궁에서 내리 갇혀 있다가 바람이 잘 통하고 탁 트여있는 공간으로 오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같이 숲길을 걷는 사람들이 분명 있는데, 손을 맞잡고 걷는 둘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주변의 그 누구도 둘을 알아채지 못하는 듯 보였다.

 “저 사람들에겐 우리가 안 보이는 걸까?”

 “그럴 수밖에. 우린 둘 다 육신이 없는 걸. 나는 흩어졌고, 너는 누워있고.”

 앞서가던 사람들이 멀어지고, 바람에 나뭇잎끼리 부딪히는 소리만이 소란했다. 말없이 발맞춰 걷는 이 순간이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저 멀리 익숙한 집의 모습이 보였다. 정든 집의 마당이 차차 가까워졌다.


 “지금에서야 알겠어. 이 열매, 네가 가진 기운이랑 똑같아.”

 영롱한 금빛을 띄는 열매를 매단 낮은 풀포기들이 집 가장자리를 따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고 이곳에서 처음 정신을 차리고 먹었던 열매. 기운을 차린답시고 먹곤 했던 고마운 열매였다.

 “이 노란 열매, 이제야 떠올랐어. 빅토리아 아일랜드에서나 귀하게 볼 수 있어서 세계수의 열매라고도 부르던 그 열매잖아. 네가 옮겨다놨구나.”

 데미안이 문을 열며 말했다. 알리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가 그걸 먹으면 내가 널 더 찾기가 쉬웠어. 쓰러져도 금방 찾아낼 수도 있었지.”

 집에 돌아온 이후로 불안정하지만 조금은 평화로운 날이 계속 되고 있었다. 알리샤는 힘에 부치는 듯 가끔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는데, 처음에는 당황했던 데미안도 어쨌든 알리샤가 곁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묵묵히 다시 나타나길 기다리곤 했다. 여태 갈망하던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어쩌면 평생을 소원하던 일상이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시든 잔가지들을 모아 벽난로에 불을 피워놓고 잠깐 잠에 들었다 깨는데 데미안은 불쑥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서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안한 마음에 데미안이 몸을 일으켜 알리샤의 이름을 불렀다. 무언가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같은 세상을 이루는 다른 한 쪽이 큰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은 알고 싶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곤 했다. 륀느가 제로에게 힘을 넘길 때의 순간이 그러했고, 지금 또한 그러했다. 검은 마법사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음을 초월자로서의 온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아마 소란스러운 바깥은 승리를 자축하는 주민들의 소리인 듯 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알리샤?”

 몸을 일으켜 창밖을 살피던 알리샤를 향해 데미안이 물었다.

 “대적자가 성공한 모양이야.”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일을 결국 해낸 모양이었다. 이제 그렇게 원하던 안식에 들 수 있게 됐는데, 마음 한 구석이 조금 이상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알리샤 옆에 선 데미안의 표정이 밝지만은 못 했다.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악의 굴레를 이제야 완전히 벗어났는데, 무조건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바로 앞에 있었다. 사령의 역할로부터 완전한 해방은 아직까지 불완전하게 세상에 살아있는 알리샤와의 이별일 테니까.

 “기쁘지 않아 보여.”

 알리샤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물론 알리샤도 무조건 기쁜 표정만은 아니었다. 찬찬히 팔을 들어올린 데미안이 알리샤의 두 볼을 양손으로 차분히 감쌌다. 하염없이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어느 때보다 슬펐다.

 “우리는 언젠가 또 만날 거고. 그렇지?”

 “…나를 이을 생명의 초월자가 나타난다면.”

 “그럼 서로 웃으면서 헤어지자.”

 어쩌면 셀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지금 마주하는 마지막 모습을 되새기며 지내야 할 텐데. 울면서 헤어진다면 다시 만나기 전까지 마음이 아플 것만 같았다. 알리샤를 곁에 두고 틈틈이 준비해뒀던 말을 데미안이 담담하게 쏟아냈다.

 “그리고 웃으면서 만나는 거야. 나 때문에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랜 세월 상대방의 죽음으로 인해 수많은 이별을 겪으면서 나름 요령이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슬프고 싶지 않다고 슬프지 않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번번이 슬픈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데미안을 올려다보는 알리샤의 두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도 애수에 잠겨있었다.

 “데미안, 네가 아주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자주 생각날 테고. 그래서 그리워도 할 테고.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다가도 네가 문득 떠오를 테지. 네 이름을 너무나도 불러주고 싶어서 몇 번이고 허공에 네 이름을 부르기도 할 거야.”

 “….”

 “…대답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부를 테지. 그렇게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서 슬퍼해도… 조금은 이해해줄래?” 

 얼굴을 감싼 데미안의 두 손등에 각각 손을 포개며 알리샤가 말했다.

 “세상이 날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새롭고 온전한 생명의 초월자에게 내 자리를 넘겨줘야할 때….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역할을 다한 날이 와서 안식에 들어야 하거든… 제일 먼저 너에게 달려갈게. 네 말대로 웃으며 달려갈게.”

 “…너무 빨리 오진 마. 넌 할 일 많잖아. 기다릴 테니까.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까. 이번엔… 내가 기다릴 테니까.”

 데미안의 말이 충분히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알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으로 담고, 손으로 담기엔 너무나도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이제 잠시 헤어져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데미안을 양팔로 꼭 껴안으며 알리샤가 속삭였다.

 “안식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데미안.”

 대답 대신 알리샤를 꼭 껴안은 데미안의 몸이 점차 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알리샤의 머리에 살포시 입을 맞춘 데미안의 모습이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데미안을 감았던 팔을 내리고 말없이 눈물 젖은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던 알리샤의 모습도 점차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햇볕과 하나되며 동화되고 있었다.


 타다 남은 잔가지들만이 불씨들과 함께 타닥거렸다.                 _Fin.
















❅ 후기 ❅

 처음엔 <연연불망(戀戀不忘) : 그리워 잊지 못 했기에> 라는 제목으로 작업을 했던 글입니다. 근데 막바지에 와보니 뭔가 아쉽더라구요. ‘연연불망’이라는 단어는 참 좋은데 과연 그 단어에 충실하게 제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회의가 먼저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제목들을 생각해봤어요. ‘약속’ 이란 제목도 생각해보고. 두 글자인 것도 마음에 들었고 엔딩 부분에 어울릴 것도 같았고 뜻도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러다가 지금의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전부터 좋아해서 자주 들었던 노래의 제목이기도 했고, 예전부터 노래 내용 자체가 데미안과 알리샤의 관계를 잘 말해줄 수 있는 노래 같아서 언젠가는 꼭 ‘다시 떠나보내다.’ 라는 곡을 테마로 글을 써봐야지, 라고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거든요. 어떻게 써놨던 글이랑도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 제목을 바꿨습니다.


 벌써 히오메를 처음 맞이했던 시절이 몇 년 전 이야기네요. 고생길 대신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는데. 부디 그곳에서는 행복하길.


2019년 2월 25일

둘을 추모하며

르비앙








 데미안 기일 교류회를 위해 작업했던 40p 중철 회지입니다. 오랜만에 하는 원고라 걱정이 많았는데 그래도 무사히 완성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교류회를 열어주신, 함께 참가해주신 교류회 멤버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말 이렇게 남겨봅니다.
 웹에 업로드하면서 하나 아쉬운 점은, 언제나처럼 A5에 작업했던 것과 블로그로 보는 건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번엔 실물로 뽑아서 더 확실히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