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x알리샤 / 메이플스토리 / 소설, 상플

[데미알리] 戀戀不忘


(연연불망 : 그리워 잊지 못 했기에)


1. 거짓말 (2)




 분명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실루엣은 이런 반갑지 않은 존재의 실루엣이 아니었는데….

 방금 막 정신을 차려 겨우 몸을 세워 앉은 참이었다. 지근거리에 서있는 존재로부터 느껴지는 불쾌한 기운에 데미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군단장으로 활동하면서 몇 번 마주할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 소름끼칠 정도로 오싹하고 찝찝한 기운을 완연하게 뒤집어쓴 힐라는 처음이었기에, 데미안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 참, 이러면 곤란한데.”

 그런 데미안의 반응이 달갑지 않은 듯 힐라가 비꼬는 말투로 빈정거렸다. 흙바닥에 덩그러니 앉아있던 데미안이 벌떡 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생기가 다 죽은 피부색부터 음침한 기운이 뚝뚝 흐르는 검은 옷차림에 잘 벼려진 낫까지. 좀체 붉은 머리칼 말고는 원래 알던 힐라와는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힐라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데미안을 쏘아보고 있었다. 데미안은 지지 않고 힐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같잖다는 비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내가 군단장을 그만 둔 이후로 검은 마법사의 취향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한 단어로 표현해줄까? 불쾌해.”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부터 힐라가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닿으니, 데미안은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무슨 용건이든 간에 힐라는 검은 마법사의 충실한 수하이니 접점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것이었고 그러니 주저할 필요도 없었다. 

 보란 듯이 힐라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 데미안의 등 뒤로 힐라 특유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부름에 응하지 않았는지 알겠네.”

 “부름? 검은 마법사가 날 부르기라도 한다고?”

 멈춰선 데미안이 고개를 돌려 힐라를 쏘아보았다. 보란 듯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은 힐라가 낫등을 차분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분은 아주, 아주 바쁘신 분이시지. 그분이 네 따위가 뭐라고 신경을 쓰겠어.”

 “뭔 소리를 하든 간에 난 다시 안 돌아가. 개수작부리지 말고 돌아 가. 검은 마법사랑은 두 번 다시 엮일 일 없어.”

 잘못된 선택은 한 번으로도 족했다. 바닥까지 추락했지만 결코 전처럼 돌아가지 말자고, 몇 번이고 스스로 다짐한 터였다.

 “글쎄. 넌 아직도 네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

 단호한 데미안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힐라가 조금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죽어가고 있을지언정,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데미안에게 그 질문은 답할 필요조차 없는 아주 이상한 질문이었다.

 “죽어? 내가 왜 죽어? 그만 해라 이제. 재미없으니까.”

 “진실을 알고 싶거든 알리샤에게 물어봐.”

 힐라는 자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던지고 있었다. 알리샤가 메이플 월드를 위해 희생하며 죽은 건 메이플 월드의 주민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힐라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알리샤야말로 죽었잖아.”

 “이런… 그 반대는 아닐까?”

 “무슨….”

 “네가 살고 알리샤가 죽은 게 아니라, 네가 죽고 알리샤가 살아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알고 왔는데.”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데미안은 힐라의 말이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다시 원래 가고자 했던 숲속 길로 고개를 돌리고 넓은 보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언제 다가온 것인지 바로 등 뒤에서 힐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름 가까이 굶어도 죽지 않는 건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결국 픽픽 쓰러지는 건 또 누가 구해주는 걸지… 궁금해본 적 없어?”

 오싹 목 뒤로 솟아나는 소름에 데미안이 신경질적으로 뒤돌았다.

 “왜. 너야? 그거 참 끔찍하네.”

 “아니, 난 나라고 한 적 없는데. 이렇게 나오니,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

 “….”

 “궁금하면 또 미친 듯이 방황하다가 쓰러져보든가. 운이 좋아서 평상시보다 일찍 정신을 차리면 답을 알 수도 있겠지?”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제발 가지?”

 “아, 이젠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만나기 힘들지도 모르겠네.”

 “…누굴 이야기하는 거야?”

 지독하게 혼자였다. 세계수 정상에서 칼을 맞고 난 후 끊긴 기억은 리프레의 작은 오두막집에서부터 다시 시작했고, 그 기억은 오로지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시간들이었다. 지인도, 가족도, 한 때의 정인도 없는 오로지 혼자만의 기억. 리프레로 온 이후로 주변엔 누구도 없었다.

 “어째서 메이플 월드의 숲들이 요즘 들어 점차 푸른빛을 잃어 가는지 생각해본 적 없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할 이유도 없었고, 생각할 여유도 없었으니. 늘 아픈 몸에 시달리느라 주변을 살필 겨를 같은 건 없었으니까.

 “이렇게까지 힌트를 줘도 못 알아듣다니, 한 때의 데미안도 다 옛날이야기군. 내가 그랬잖아. 알리샤는 죽지 않았다고.”

 “알리샤가… 살아있다고…?”

 죽은 줄만 알았던 그리운 이름이 살아있다니. 한껏 강성하게 나오던 데미안의 기세가 한풀 꺾인 채로 힐라를 마주하고 있었다. 멍하니 주변을 배회하는 데미안의 눈동자를 차분히 읽어낸 힐라가 설명을 덧붙였다.

 “쓸데없이 힘을 쓰고 있잖아. 너 하나 구하겠다고. 조용히 살면서 자기 할 일이나 하면 될 것을, 너 때문에 온 숲의 생명력을 대가로 쓰고 있잖아. 모르겠어?”

 “나를… 구한다고….”

 “그니까 물어봐. 진실에 대한 답을.”

 “…….”

 “네가 답을 알게 되는 날, 날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다시 보자구.”

 깔깔거리는 웃음을 남긴 채로, 힐라의 모습이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한순간에 너무 많은 정보가 데미안의 뇌에 충격을 준 터라, 데미안은 땅에 박힌 듯이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알리샤가 살아있다니. 꿈에서나 일어날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게 사실이라면…. 데미안의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내용으로 마구 휘돌았다. 무슨 생각을 먼저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겨우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데미안은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창밖은 깜깜했고 집안은 고요했다. 벽을 더듬어 전등을 키자 채 정리되지 않은 어지러운 식탁이 눈에 띄었다. 대충 한쪽으로 그릇들을 쌓아두고 부싯돌로 불을 피운 데미안이 찬장을 열었다. 며칠 전 집 앞에서 딴 이름 모를 노란 열매들이 봉긋하게 쌓여있었다. 막 땄을 때는 금색의 샛노란 빛을 내던 열매들이 조금은 어두운 노란 빛이 되어있었지만 데미안은 상관하지 않았다. 대략 열매 한 줌을 쥔 데미안이 막 물을 부은 놋 주전자에 노란 열매를 털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수로 물어보라는 거야.”

 세계수 사건 이후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마음에 꾹꾹 눌러 담고 살고 있었는데….

 보글보글 놋 주전자가 끓기 시작하자 데미안이 주전자의 뚜껑을 열었다. 뽀그르르 올라오는 기포와 함께 물속을 휘도는 노란 열매를 데미안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열매인지는 모르나, 집 앞에 기절했을 때 본능적으로 입에 가져가면서 처음 먹게 된 열매였다. 향이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뒷맛이 남는 노란 열매는 그 이후로 가끔 끼니를 챙겨야한다는 생각이 들면 밥 대신 집어 먹거나 끓여 먹으며 기운을 차리는 나름의 주식이기도 했다.

 주전자를 식탁에 옮긴 후 열매 달인 물을 컵에 부은 데미안이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데미안이 차분히 컵을 입에 가져다 대며 힐라의 말을 곱씹었다. 

 “알리샤에게 물어보라고? 알리샤는 죽었는데… 살아있다고?”

 기억을 확실히 해보자면, 알리샤의 마지막 음성을 들은 건 세계수 정상이 아니었다. 제일 처음에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알리샤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작은 속삭임이 이어지다가 알리샤는 마지막에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너는 죽지 않았어….

 단지 몸이 좋지 않아서 혼자 환청에 시달렸다고만 생각했는데, 힐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진정 알리샤의 음성일 수도 있었다. 그리운 사람, 그리운 목소리. 데미안이 차분히 두 눈을 감았다.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싼 컵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당연하게도 알리샤가 떠올렸다. 깨면서 제일 처음 들었던 음성. 환청이었을 거라고 자책하며 부정하려고 했던 음성.

 “내 모습을….”

 “…뭐라고?”

 막 알리샤의 속삭임을 떠올리려고 했을 때 불현 듯 목소리가 들렸다. 번뜩 눈을 뜬 데미안이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내 모습을 따라가지 말아줘…”

 분명 알리샤의 목소리였다. 소리의 근원이 어딘지 방향을 특정할 수 없었지만, 분명 알리샤의 음성이었다.

 “알리샤?”

 “제발….”

 제발, 이라는 말과 함께 더 이상 알리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적막이 흐르는 집안을 데미안이 벌떡 일어나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고 언제나처럼 혼자인 것만을 깨달을 뿐이었다.

 “알리샤….”

 떨리는 음성으로 알리샤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을 다 정리하지도 못 했는데.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다리에 힘이 풀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데미안이 앞으로 몸을 웅크렸다. 식은 찻잔의 찬 감촉만이 무엇보다도 선명했다. 한참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데미안이 여태 묻어두었던 수 만 개의 문장 중 한 문장을 짧게 내뱉었다.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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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도록, 가을을 닮은 사랑이라서... (이러고 가을 안에 완결을 내고 싶었으나)

대략 9편 정도 될 거 같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