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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알리] 아프게 피어난, 02




아프게 피어난, 02

데미안의 방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모험가라 부르는 여러 인간들이 알리샤를 찾아왔다.

루타비스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던 알리샤와 달리, 그들은 아주 자유롭게 그 곳을 드나들 수 있었는데, 그런 알리샤를 구해주겠노라고 그들은 약속했다.

알리샤는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아직 바깥 판세를 모르는 상황인지라, 누가 적이고 같은 편일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알리샤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원래처럼 힘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계가 깨지던 날 걸린 저주 때문인지, 회복 속도는 매우 더디게 느껴졌다.

모험가들이라는 자들과 약속을 했다는 사실이 알리샤의 기억에서 잊혀질 즈음에, 4개의 문 밖에는 소란이 일었고,

그 소란이 잦아드는 와중에 알리샤는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가뿐한 느낌이 들었음은 물론, 이젠 결계 밖으로 발을 내딛어도 서늘한 기운이 온 몸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속을 했던 자들은 시그너스 기사단이라는 사람들에게 알리샤를 인계해주었고,

덕분에 에레브에 아무 탈 없이 도착한 알리샤는 여제의 호의 속에서 신수의 곁에서 쉴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곳이야... 수백년 전에는 이런 세상이 올 수 있을거라 상상도 못 했었는데. 이런 평화가 지속될 수 있을까?"

빛조차도 쉽게 스며들지 못 했던 루타비스에 머물던 알리샤에게,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볕은 따뜻했고 바람은 신선했다.

가끔은 머물던 신수의 머리 보석을 빠져나와 풀숲을 거닐기도 했다. 


"이런 세상을 위해 나는 싸웠던 거야.. 내 힘을 다 쓸만큼 가치가 있어, 이 정도면."


하지만 그러한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 했다.

연합회의에 참석한다며 기사단을 이끌고 여제가 에레브를 떠난 뒤, 루타비스에서 마주했던 서늘한 기운이 알리샤의 온 몸을 죄어왔다.

그리고 그 이후론 정신을 잃어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분명 신수의 머리보석 안에 머물고 있었는데, 깨어보니 신수를 마주보고 있었다.


"신..수? 신수님?"

자애롭던 눈빛도, 성스러운 기운의 깃도 더 이상 빛이 나지 않았다.

뭔가 이건 잘못 된거야, 싶은 찰나에 알리샤의 팔을 잡아채는 거친 손길의 주인을 마주하고는 깜짝 놀랐다.


"여기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지? 내가 지켜준다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걸 보면?"

"너.. 잡초!"

"오랜만이군. 내가 그 쪽을 해치지도 않을꺼라 했는데. 믿을 수가 없었나?"

"너..가 죽였구나."

"눈치는 빠른 것 같은데.. 참 답답한 초월자군 그래."

"지금 저 숲에 지른 불도 다 잡초 너의 짓이겠구나."

"알아주니 참 고맙군."

"나 때문이야? 이렇게 신수를 죽이고, 에레브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유가?"

"뭐,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데미안이 킬킬 거리며 웃었다. 데미안이 손에 쥔 칼 끝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비릿한 피의 향. 숲이 타며 지르는 처절한 소리. 에레브의 공기를 가득 메운 검은 기운. 그리고 그.. 마족의 기운.


"인간에 가까운 존재이면서 마족의 힘을 쓰는구나."

"역시, 초월자는 다르군. 보이지 않는 것도 다 아니까 말이야."

"..."

"다 알면, 그냥 날 조용히 따라와. 그게 모두를 위한 일이란걸 알았으면 말이야."


데미안은 알리샤의 옷 소매를 잡아 끌었다. 알리샤는 끌려가는 와중에 잠시 신수를 뒤돌아보곤 말 없이 데미안의 걸음을 따랐다.

걸으면서 행복했던 그 풀숲들은 더 이상 푸른빛 대신 거무죽죽한 색을 낼 뿐이었으며, 코를 간질이던 향긋한 내음도 이젠 매캐하게 탄 냄새 뿐이었다.


"난 끌려가는게 아니라, 나 때문에 피해받지 않게하려고 널 따라가는거야. 그니까 이 소매는 놔줬으면 좋겠어."

데미안이 별 거 아니라는 듯, 알리샤의 소매를 놓았다.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거지?"

알리샤의 물음에 답하기는 커녕 데미안은 질문을 던졌다.


"예전의 힘은 회복했나? 난 그걸 기대하며 왔는데."

알리샤는 아무 말도 없이 데미안을 따라갈 뿐이었다.


한참을 성큼성큼 걷던 데미안은 잠시 쉬자는 제안을 했고, 알리샤는 말 없이 데미안을 따랐다.

데미안은 알리샤를 풀밭에 잠깐 앉혀두곤 열 걸음가량 떨어진 곳의 그루터기에 홀로 앉았다.


그런 데미안의 뒷 모습을 보며 알리샤는 쏘아붙였다.

"곧 기사단이 에레브로 돌아올텐데 넌 참으로 태평하구나, 잡초. 너의 힘에 대해 무척 자신감이 넘치나보구나?"


하지만 알리샤의 쏘아붙임에도 데미안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없을 뿐이었는데, 그러한 데미안의 태도에 알리샤는 의아함을 느꼈다.


"야, 잡초!"

알리샤는 벌떡 일어나 데미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지마. 거기.. 있어."

"몸을 사릴 줄 알아야지 멍청아!"

"..."

"인간의 가까운 존재면서 마족의 힘을 다루니, 그 기운을 니가 통제 못하는거잖아, 지금!"

"..."

"그 힘을 계속 다루려 든다면, 그 기운에 말려 넌 스스로 파멸하게 될거야."

"쿨럭, 그 단어 한 번 괜찮네. 파멸이라.."

"뭐?"

"파멸이라. 죽음.. 뭐 이런 것 보다 뭔가 더 멋있게 들리지 않아?"

"이 바보야. 파멸로써 넌 고통스럽게 죽을거라구!"

"이미 늦었어, 되돌리기엔."

데미안은 고통 속에서 간헐적으로 알리샤의 대답에 반응하듯 킬킬거렸고, 알리샤는 그런 데미안의 모습을 미간을 찌푸린 째로 쳐다봤다.


"넌 그러다가 너가 원하는 바도 못 이루고 죽을껄? 손 내봐."

"..뭐하는거야."

"난 모두를 위해 널 따라가고 있는거고, 니가 죽어버려도 아마 난 어떤 방법으로든지 갇혀있겠지. 그건 너 같은 애들은 또 만나야한다는 거잖아? 그건 싫거든. 차라리 안면 튼 니가 날 잡고있는게 낫겠지."


알리샤가 내민 손에, 데미안은 군말 없이 양 손을 포개어 내밀었다. 서로 마주잡은 두 손에서 피어난 황금빛 기운이 데미안의 몸으로 옮겨갔다.

"내가 해줄 수 있는건 여기까지가 다야."

"왜 이렇게까지 하는거지?"

"원하는 것도 못 이루고 죽을 너가 불쌍해서 그런다."

"초월자라면서 말하는 꼴 하고는."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어난 데미안과 그 뒤를 툴툴거리며 따르는 알리샤였다.

데미안은 어디 정해 둔 곳이 있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는데, 그 뒤를 쫒아가던 알리샤는 꽤 자주 넘어지곤 했다.


"아니 이거 진짜 애도 아니고 막 넘어지니, 이것 참."

"애초에 난 너같은 생명체처럼 이렇게 막 걸어다니진 않아. 그리고 오래 쉬는 바람에 이렇게 많이 걸을 일도 없었다구!"

"그럼 너같은 생명체는 어떻게 다니는데?"

"그야 내 힘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지금은.. 니가 건 봉인 때문에 안돼."

"그 봉인 풀어주면 잘 걸어다닐 수 있어? 이거 넘어지는게 너무 짠해서 눈을 뜨고 볼 수가 없군. 풀어줄테니까 어디 한 번 해봐."

"진짜 풀어준다고?"

"그렇다니까? 자, 풀었어. 한 번 해보든가."

데미안이 호기롭게 웃어보이며 제안했다.


봉인을 풀어줬다는 데미안의 말과는 달리 알리샤는 아무런 미동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너.. 풀어 준 것 맞아?"

"너.. 초월자 맞냐?"

"지금은 내가.. 많이 약해져서 그래. 원랜 쉽게 잘 하는데."

"순진하긴. 내가 풀어줬을 것 같아?"

"너 그 봉인 풀어줬는데도, 내가 아무 것도 못하니까 나 덜 부끄러우라고 안 풀어준 척 하는거지? 나 그 정도로 바보 아니거든? 그게 더 자존심 상해."

"나 참.. 그래, 맞아. 난 분명히 니가 원하는 봉인도 풀어줬다? 근데 니가 안 도망간거야. 그니까 다시 건다?"

"..."

"아 이거 참, 이렇게 걸어가다간 날 새겠는데."

데미안이 머리를 손으로 긁적이며  흠, 하고 고민에 빠졌다.


"걷는 것 말고, 다른 방법 없어? 니가 목적지까지 무작정 걸어가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야."

"그건 맞아. 아, 근데 니가 이 정도 일줄은.."

"나정도 되는 존재를 데리고 가려면 그 정도 고생은 예상 했어야지. 정 눈뜨고 내가 걷는 걸 보기 힘들면, 잡초 너가 날 업고 가시든지."

"내가 널 왜 업어. 그럼 마법진을 써야하나?"

"뭐야, 여태껏 다른 방법을 알면서도 무작정 걷던거야?"

"다른 군단장들이 알아버리면 귀찮아지는데. 야, 너 마법진 그릴 줄 아냐?"

"알고 있는거야 몇 개 있지. 근데 그거라면 너도 아는게 있을거 아냐."

"군단장들끼리 공유하는 마법진 밖에 몰라. 그냥 기본만 그려봐. 경로는 내가 표시할게."


알리샤는 나름 기억나는대로 마법진을 그려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주문이어서 그런지, 잘 못 그려서 그런건진 몰라도 작동은 커녕 바람도 일지 않았다.

"아이, 안되네. 너무 오래전꺼라 그런가봐."

"비켜봐, 귀찮아지겠지만 어쩔 수 없지."

데미안은 능숙하게 마법진을 그려놓고 알리샤의 팔목을 붙잡고는 주문을 외웠다.



"여긴 리프레같은데."

마법진으로 이동한 뒤 숨이 차 주저앉은 알리샤가 주변을 돌아보곤 말했다.

풀이 우거진 숲 속, 그 어두운 한 가운데에 도착한 둘. 나뭇잎끼리 부딪혀 스작이는 소리와 바람 소리로 가득했다.


"오려던 곳이 여기야?"

"아니, 기다려봐."


데미안이 품 속에서 둘둘 말려있는 주문서를 꺼내 펼쳤다.

알리샤는 그런 데미안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삐쭉 내밀고는 손을 내밀었다.


"나도 줘."

"주문서 한 장 밖에 없는데?"

"그럼 그 주문서 다인용이야?"

"아니."

"그럼 나 여기에 놔두고 너만 가려고? 인질을 그렇게 다루는 법이 어딨어?"

"잔말 말고 여기 딱 붙어. 이제 주문서 외운다?"

데미안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등 뒤를 가르키며 말했다. 


"내가 거길 왜 붙어? 장난말고 내가 쓸 주문서 줘."

"붙어서 가기 싫으면, 뭐 여기 혼자 남게? 힘은 봉인되서 쓰지도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여기 밤되면 진짜 무서울텐데?"

"너가 날 떠나주면, 나야 아주 고맙지. 날 풀어준다는 소리잖아? 아주 좋다구나 하고 도망가면 되는거지, 뭐."

"가다가 몬스터라도 만나면 '안녕? 길 좀 비켜줄래?' 뭐, 이럴려고?"

"..."

"그냥 좋게 내 말 들어."

"근데 만약 잡초 니 말대로 하고, 주문서 썼는데 너한테만 작동하면?"

"너 아까 나같은 생명체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어. 당연히 아니지."

"어차피 넌 사람이 아니라서 이 주문서는 널 내 짐짝정도로 생각할거야. 과인원은 아닌거지. 그럼 문제 해결된건가?"


알리샤는 입을 삐죽이며 데미안 뒤로 다가서서는 자켓 끝자락을 살짝 잡았다.

"그렇게 잡으면 내 옷을 스쳐가는 먼지정도로 생각돼서, 너 낙오될거 같은데."

"그럼 뭘 더 어떻게 잡으면 되는데?"

"내가 그랬잖아. 딱 붙으라고."

데미안이 알리샤의 두 손을 잡더니 자신의 앞으로 팔을 크로스하며 허리를 감았다.


"차라리 계속 걷자고 할걸 그랬어."

알리샤가 살짝 상기된 고개를 뒤로 돌리며 말했다.

"빨리 주문서나 외워. 나 이런거 딱 질색이야."

데미안은 피식 웃으며 그런 알리샤를 살짝 일별하고는 주문서를 외웠다.



주문서를 외우자 빠르게 공간이 휘몰아치더니, 눈 앞에 루타비스와 똑닮은 곳이 나타났다.

데미안의 등 뒤로 고개를 내민 알리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눈 앞의 장면을 멈춘듯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똑같은데, 달라.."

"반가운 장소에 대한 감회가 새로운건 알겠는데, 여기 그 질색이라던 팔은 좀 풀어봐."

알리샤가 재빨리 뒷걸음질을 쳐 데미안으로부터 물러섰다. 


"너가 쉬던 곳이랑 꽤 비슷하지 않아? 어때? 물론 넌 에레브가 훨씬 더 마음에 든 것 같던데.. 에레브같은 감옥은 감옥이 아니지."


루타비스처럼 어둡고, 약간은 습한 곳이었다. 철문도 똑같이 4군데에 설치되어있었고, 2개의 입출입 포탈이 존재했다.

데미안의 은신처임을 증명하듯, 곳곳에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있었다.

중앙부에는 사각원목탁자가 놓여있고, 그 주변엔 두꺼운 나무 줄기를 대강 베어놓은 듯한 의자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데미안은 그 중 한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하였고 알리샤는 고분고분 의자를 정돈하곤 앉았다. 데미안은 식사 생각이 없냐고 물었고, 알리샤는 고개를 휘저었다.


"뭐야, 첫날부터 단식인가? 그래서 굶어 죽기라도 하려고?"

"..."

"근데 어쩌나. 우리 초월자님은 굶어도 죽지는 못하실텐데."

"..."

"그것 참 부럽습니다, 초월자님."

"잡아 가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놀리기까지 해야해?"

"놀리는게 아니라 말그대로 부럽다는건데, 그리 받아들인다면 뭐 나야 할 말이 없지."

"나 때문에 생길 피해가 없길 바라서 여기 있는거지, 니가 원하는거에 난 동조하지 않을거야." 

"그래도 먹어둬. 몰골 험한 여신님은 별로 보고싶지 않으니까. 지금정도는 예뻐야 뭐 가둬도 죄책감이 생기는건데. 먹어둬."

데미안은 요깃거리를 남겨놓고는, 자신이 할 일이 남았다며 그 곳을 떴다.


알리샤는 순식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정신이 없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모든게 혼란스러워.. 한숨을 내쉬며 알리샤는 데미안이 떠나간 포탈을 먼 산보듯 쳐다봤다.


알리샤는 이제부터 정말 쉬어야겠다곤 하곤 한 쪽에 자리를 잡곤 숙면을 취하며, 그 곳을 드나드는 데미안에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 또한 그런 알리샤를 신경쓰지 않는 듯, 잠깐잠깐 자신이 필요할 때만 은신처에 들리곤 휑하니 나가버리곤 했다.


잠으로만 힘을 회복하던 알리샤였지만, 가끔 잠에서 깨서 스스로의 힘을 가늠해보자면, 슬슬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혹시 모른다. 데미안이 걸어놓은 봉인은 가볍게 무시할 정도로 힘이 회복되었을지도.



알리샤는 원목탁자 옆 의자에 앉아서 바닥에 평행하게 손을 뻗었다.

아주 기초적인 마법이니 안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없던 흙바닥이 봉긋이 솟더니, 그 사이로 새싹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됐다! 를 외치는 알리샤의 손길이 허공에서 나비처럼 춤을 출 때마다, 새싹이 자라선 묘목이 되고, 잎이 푸르게 달리고, 크고 두터워졌다.

알리샤는 자신의 키를 넘도록 자라는 나무를 바라보며 양 팔을 넓게 펴선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멀리 천장의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볕이 나무로 쏱아졌다. 그 볕을 받은 나무는 알리샤의 키를 훌쩍 넘어, 천장의 볕을 향해 찬란하게 자라났다.

굵은 줄기위로, 얇은 줄기와 잎이 촘촘히 커다란 구 모양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커다란 나무가 생겨난 후, 알리샤는 나무 맨 꼭대기 잎이 우거진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폭신하게 잎에 파묻힌 알리샤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볕을 맘껏 누렸다.


정말 오랜만에 느낄 수 있는 포근함. 따뜻함.



볕이 잦아들고, 천장의 구멍에 어둠이 차차 깔릴 무렵, 한참을 흐르던 고요 사이로 인기척이 들리더니, 이내 데미안의 모습이 나무 위로 불쑥 올라왔다.

그런 데미안에게 알리샤가 고개를 돌리자, 갑자기 으흑- 하는 소리와 함께 데미안의 모습이 나무 아래로 꺼졌다.

그런 데미안의 모습에 놀라 알리샤가 벌떡 일어나 데미안이 떨어진 방향으로 무릎걸음을 쳤다.


"거기, 잡초? 괜찮아?"

데미안의 왼쪽 발 끝이 우거진 나무 밖으로 살짝 나와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왼발은 들어가고 오른발 끝이 나무 밖으로 나왔다.

발 끝에선 떨림도 보였다. 그건, 발버둥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대가로 받은 마기의 고통.

에레브 그루터기에서의 그 모습. 일부러 알리샤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듯 몸을 두꺼운 줄기쪽으로 옮겼는지 곧 알리샤의 시선에는 데미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알리샤는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선 데미안이 올라왔던 곳을 쳐다보고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온 몸이 땀으로 젖은 데미안이 기진맥진한 숨을 내쉬며 나타났다.


"바보. 나무도 못 타냐?"

"나무는 우리 형이 잘 타는데, 아직도 난 멀었군."

데미안은 자신의 옷자락을 털면서 알리샤의 곁으로 다가왔다.


"뭔가 이 침침한 공간에 이렇게 푸른 나무가 있으니까, 분위기가 좀 한결 낫네."

알리샤는 그런 데미안의 반응에 웃어보였다.


"봐봐. 내 취향이 고딕한 것 만은 아니야. 아, 바람 좋다."

알리샤가 두 팔을 쭉 뻗으며 잎 속에 다시 파묻혔다.


그런 알리샤를 보며 데미안도 두 손을 머리 뒤로깍지 끼곤 여유만만하게 누웠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어두워진 천장의 구멍으론 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미동도 없는 둘은 다만, 그 순간에 머무를 뿐..



바람을 타고 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