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x루시드 / 메이플스토리 / 소설, 상플




[윌루시] 조우(遭遇)


- 르비앙


[이전 이야기] 깊은 거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습격을 받은 윌은 가까스로 루시드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진다. 생존을 위해 단합한 메이플 월드의 주민들로부터 피해있는 것도 잠시, 검은 마법사가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윽고 그의 수하였던 군단장들 중 살아있는 군단장들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지고, 윌과 루시드는 도망 끝에 엘나스의 외딴 오두막집에서 다시 조우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훗날 발간될 르비앙의 윌루시 개인지에서 확인해주세요.


 하얀 눈이 쌓인 엘나스에도 밤이 찾아왔다. 다시 불을 품은 벽난로는 장작을 품고 주변으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벽난로에 바짝 붙어 앉아서 불을 쬐는 루시드의 뒷모습을 윌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찾아온 것인지 윌의 한 손에는 유리 술병을, 한 손에는 두 개의 유리잔을 들려있었다. 윌이 루시드의 곁에 온 것도 잠시, 루시드가 술병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윌이 알겠다는 듯 유리잔 하나를 먼발치에 세워두고는 다른 유리잔에 술을 채웠다.

 “사람들은 환호하더군요. 그분을 무찔렀다고. 나는 도저히 기쁠 수가 없는데,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아요. 그리고는 마을마다 날 잡겠다고 전단지들을 붙여놨어요. 과연 난, 아니- 우리에게는 뭐가 남았죠?”

 루시드의 물음에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던 윌이 반이나 술이 채워진 유리잔을 훌쩍 기울였다. 유리잔이 비는 것도 잠시, 윌은 또다시 술병의 입구를 유리잔에 처박으며 잔을 채웠다.

 “나는 나고 자란 곳이 에우렐 뿐이라 돌아갈 곳도 없어요. 내 존재를 다 지우고 또 도망쳐버릴까 생각했어요. 그건… 내가 제일 잘하는 거니까. 그런데….”

 “….”

 “만약 이번에도 그러다가 잘못되면, 이번엔 날 구해줄 존재를 만나지 못 할 거 같아서… 그분 같은 존재를….”

 루시드가 말끝을 흐렸다. 애써 흔들리는 목소리를 삼키려는 듯 보였다. 그런 루시드를 윌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육체가 얼음 속에 갇힌 채 정신만 또렷이 살아서 꿈속에서 방황하던 게 너무 싫어서… 무서워서. 그래서 그러고 있었어요. 아무 것도 못 하고.”

 결국 주군의 뜻을 돌리지 못하고 대적자도 막지 못한 군단장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보다도 초라했다. 남은 건 돌아갈 곳 없는 지친 몸뚱이 뿐이었으니까.

 “당신은 두렵지 않았나요?”

 “뭘… 말씀하시는 거죠?”

 “그분의 이상이요.”

 지금 와서 묻기엔 참으로 의미 없는 질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늘보다 높게 떠받들며, 그 누구보다도 진실한 충성을 맹세했던 주군의 이상이란. 이제 와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들어봐야, 바뀔 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답을 하는 윌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담담했다.

 “…두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죽는다는 게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검은 마법사 그분조차 존재하지 않을 아무 것도 없는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구요?”

 “흠, 죽음이라….”

 루시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지만, 윌은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마저 비우고는 답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지식이라면, 무서울 게 없지 않을까요?”

 “가치가 있는 지식?”

 “내 목숨 하나를 담보로, 누구도 그릴 수 없지만 그분만은 그릴 수 있는 완벽한 세상을 볼 수 있다……. 그 정도면 목숨값으로는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참 이상하네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어요. 아마 평생이 지나도 이해하지 못 할 거예요.”

 루시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인생에서 그만한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윌의 머릿속엔 목숨과 맞바꿔도 충분할 이상향이 펼쳐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굴에 무엇이 그리도 만족스러운지, 평상시에 종종 볼 수 있는 비열한 웃음과는 다른 진한 웃음이 어리어있었다. 불꽃이 움직이는 모양새 때문에 조금은 광기 어린 웃음처럼 보이기도 했다.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있어도 그런 기회가 온다는 보장이 없죠. 그렇게 따지자면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결코,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요.”

 “그렇군요.”

 루시드의 답으로 막 현실로 돌아온 듯한 윌의 얼굴엔 다시 차갑고 마른 표정이 걸렸다.

 “지금이라도 그만한 능력이 있는 누군가가 똑같은 제안을 한다면, 나는 같은 대답을 할 겁니다. 내 목숨과 부디 맞바꿔달라고. 단 1초에 못 미치는 시간이라도 좋으니, 창세의 목격자가 되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랬군요.”

 “….”

 “같은 그분의 이상을 보고도… 그분의 마음을 돌리려 한 나. 받아들인 당신. 다른 방식으로 충성을 바쳤던 이유요.”

 “…이제 그것도 옛날 일이 되어버렸지요.”

 “그러게요. 충성을 대가로 받았던 모든 힘을 다 잃고… 이렇게….”

 루시드가 허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군단장이란 이름으로, 누구도 부럽지 않은 힘을 다룰 수 있던 손은 차차 평범한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실없는 한탄이었다. 허공에 덧없이 흩어지는 탄식만이 남아있었다.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과거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며 한탄을 하고 회상을 한들… 뭐가 바뀌겠어요.”

 “….”

 “이미 세상은….”

 이제 남은 것은 내리막뿐이었다. 어쩌면 진절머리 나게 도망치고 싶던 과거보다 더 끔찍한 미래가 훤했으니까. 바로 눈앞에 미래 그 자체가 떡하니 괴물의 모습을 한 채, 아가리를 열고 그 안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단지 작은 악몽으로만 치부되기엔 사소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분이 없는 세상이라며 평화만을 노래할 뿐인데.”

 마지막으로 털어 넣은 장작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젠 이곳도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윌은 비어버린 술병을 벽에 밀어두곤 마지막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술병 안에 든 것은 술이 아니라 물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조차 모르겠어요. 힘은 잃어버렸고, 나는 볼품없이 남았는데… 이 자리에서 주민들에게 사로잡혀 최후를 맞이하면 그만일까요?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게 그들의 소원이라면 그대로 따라주면 되는 걸까요? 참 초라하네요. 내 끝이라는 거. 이런 건 상상도 안 해봤는데.”

 세운 무릎을 향해 얼굴을 파묻고 팔로 두 다리와 자기 자신을 끌어안은 루시드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힘이 없었다. 그런 루시드를 향해 윌이 정중히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어딜… 말씀이시죠?”

 “우리 둘을 기억하는 자들이 오롯이 우리 둘 뿐인 곳으로.”

 “지금 같은 세상에 그런 곳이 있을까요?”

 “숨겨둔 한 수는 늘 있는 법이니까요.”

 전과 같았으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매몰차게 거절하고 말 상대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이 먼저 앞섰다. 마치 여태 그러한 제안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차분히 허공을 가른 루시드의 손이 윌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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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이 원래 저런 전개를 계획하진 않았는데, 원래 쓰려던대로 쓰자면 앞의 [이전 이야기]에나 나올 세세한 이야기까지 나와야할 거 같아서 급변경.. 쓰면서도 원하던 만큼 찰진 대사와 재미와 표현이 안 나와서 아마 회지 작업하게되면 뒷부분이 통째로 바뀔 거 같습니다. 이 챕터는 개인지의 중간-중후반 정도.머리에 드는 생각도 많고 메모한 내용도 많은데 하나로 작업하려고 마음 먹는 게 쉽지가 않네요. 가볍게 손 풀었으니 2월 중순에 있을 마감에 다시 집중해봅니다!


190204 부분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