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x루시드 / 메이플스토리 / 소설, 상플

[윌루시] 빗속에서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들이 빗방울들을 쏟아냈다. 얇은 빗줄기는 점차 굵어져서 허공에 사선을 그리며 사납게 쏟아졌고, 축제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북적였던 레헬른 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했다. 음식을 날랐을 쟁반과 그릇들은 골목 이곳저곳을 뒹굴고 있었고, 채 먹다 남은 음식들은 쏟아지는 비를 뒤집어 쓰면서 그 모양새가 퍽 처량했다. 길거리를 가득 메웠던 인파는 모두 비를 피하려 지붕이 있는 곳마다 모였으나, 곧 그치지 않을 비임을 깨닫고는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계탑 위에서 텅텅 비어가는 골목을 내려다보던 루시드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특별히 무엇을 정해놓고 내려다보는 것도 아니었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는 휑한 마을을 습관처럼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문득, 아무도 없는 레헬른 무도회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고, 점점 물웅덩이만이 많아지는 곳.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도회장 한복판에서 춤을 추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마음을 두들겼다. 루시드가 몸을 일으켜 옷장을 향했다.
 구두를 바꿔 신고, 모자를 머리 위에 살포시 고정했다. 보석함을 열어 수수한 귀고리 대신 붉은 루비가 박힌 귀고리로 갈아끼고, 집히는 대로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끼웠다. 우산은 필요하지 않았다.



 레헬른에도 이런 조용한 순간이 있을 수 있구나 싶어서 조금은 신기하기도 했다. 끝을 모르는 채로 모두가 미쳐 돌아가는 마을. 주군을 만나기 위해, 아케인 리버의 하류로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지나야 하는 마을이었다. 늘상 시끄럽고 정신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한 걸음 떨어져서 관망하기에 흥미로운 곳이기도 했다. 같은 주군을 모시고 있는 루시드가 관장하는 곳이자, 일이 바쁘지 않으면 며칠이고 머물다가 가는 곳. 윌에게 레헬른은 그런 곳이었다.
 윌이 막 뜨거운 물을 부은 찻잔을 잠시 입가에 가져가며 창가로 향했다. 금방 그칠 거 같지는 않은 빗줄기였다. 기분 좋은 커피의 향을 음미하던 윌의 시야에 익숙한 뒷모습이 들어왔다. 모두가 비를 피해 지붕 밑으로 숨어들기 바빴는데, 단 한 사람- 루시드는 오히려 세찬 빗속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체 뭘 하려고….”
 윌이 뒷 문장을 삼켰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음악도, 축제도, 인파도 다 끊긴 마을에서. 대체 뭘 하려는 걸까.
 문득 이는 궁금함이었다. 윌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벽에 걸려있던 검정 케이프를 둘렀다. 문 옆에 비스듬히 세워뒀던 우산을 들고 윌이 방을 나섰다.



 전축을 켜자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빗소리에 섞여 음악이 깔끔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춤을 추는 데에 부족함은 없을 터였다. 양팔을 펼치고 무대 한가운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정식으로 배운 춤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와 함께 맞춰보며 익힌 춤도 아니었다. 시계탑 꼭대기에 서서 가면을 쓴 자들이 음악에 맞춰 추는 것을 본 것이 다였다. 하지만 손끝에서 팔, 발끝에서 머리끝으로 이어지는 춤선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마치 상대가 있는 것처럼. 때로는 고개를 움직이고 팔을 들어 올려 가볍게 한 바퀴를 도는 모든 동작들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박자가 딱딱 맞았다. 마치 나비가 된 것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게. 비를 머금은 옷은 평상시보다 무거웠지만, 허공을 향해 춤선을 그을 때마다 피부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오히려 시원했다.
 마지막 음에 맞춰 양팔을 뻗어 한 바퀴를 돌고는 멈춰 섰다. 아무도 없지만 마치 수많은 청중 앞에 서 있던 것처럼. 저 멀리서부터 허공을 가르는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것처럼. 음악이 끝난 자리에 세찬 빗소리가 그러한 상상을 대신했지만 루시드는 자연스럽게 뻗었던 팔을 내리고 숨을 골랐다.
 “Brava.”

 빗소리를 뚫고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루시드가 고개를 돌리자 무대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보라색 우산을 비스듬히 든 누군가가 서있었다.
 우산을 품에 끼워 살짝 기울인 상태로, 윌이 천천히 두 손바닥을 부딪치며 박수를 쳤다. 손바닥이 부딪힐 때마다 우산 끝에서 물방울들이 우수수 더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윌의 등장에 루시드가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저 자가 이곳에 있는 걸까. 언제부터 저기 있던 걸까. 레헬른에 잠시 머무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시계탑으로부터 조금은 떨어진 곳, 바로 내 앞에. 왜 여기에 있는 걸까.
 하나만은 확실했다. 여태까지의 상상력은 아주 빈약했다고. 꿈으로, 상상으로 만들어낸 박수갈채 따위보다, 지금 눈앞에 홀로 서있는 자가 치고있는 저 느린 박수가 훨씬 좋다고. 그 박수가 성의가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춤을 출 때는 몰랐지만, 춤을 멈추니 후끈 달아올랐던 체온이, 조금은 가쁜 호흡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지는, 어깨선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의 자국이 이제야 실감나기 시작했다.
 “아케인 리버 지역의 비는 맞아서 좋을 게 없을 텐데요.”
 우산을 바르게 고쳐 쓰며 윌이 말했다. 윌의 안경알에는 빗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루시드는 대답 대신 윌을 빤히 마주봤다. 늘 느끼는 것이었지만 표정이 쉬이 읽히지 않는 상대였다. 선의인지, 악의인지. 좀체 읽히지 않아 제멋대로 해석하게 만드는 능력.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었다. 이렇게 되면, 또 다시 마음대로 해석하고 싶어지는데.
 “무도회장을 홀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죠.”
 짧게 답을 한 루시드가 무대를 벗어나 윌이 있는 바닥을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내딛었다. 짧은 계단을 내려오자 윌이 루시드 쪽을 향해 살짝 우산을 내밀었다. 저 선의는 몸에 밴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걸까. 윌의 등 뒤에도 조금씩 빗줄기가 스치며 흔적이 남기 시작했다.
 루시드가 윌 바로 앞에 섰다.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윌이 내려다보고 있는 눈높이는 조금 높았다. 루시드가 발돋음을 하자 윌의 얼굴이 매우 가까워졌다. 단 손가락 두 마디 간격. 갑작스러운 루시드의 행동에도 윌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발끝으로 선 루시드가 살짝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로 윌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짧고, 가볍게. 입술을 뗀 루시드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건 박수에 대한 내 보답이에요. 감사 인사.”
 발뒤꿈치를 살포시 땅에 내려놓으며 루시드의 눈동자는 윌의 얼굴을 훑었다. 얼굴색이 매우 침착하고 평온해서 마치 호수에 돌을 던지는데도 아무런 파장이 일지 않는 것만 같았다. 돌이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고 호수 밑바닥으로 추락해버린 것처럼.
 “역시 예상 그대로네요. 눈 하나 깜짝 않네.”
 “제가 모르는 새에 이곳에 새로운 인사법이라도 생긴 건가요?”
 제멋대로인 마을에 루시드 마음대로 새로운 규칙이 하나 생겼다고 놀랄 일은 아니었다. 
 “막 궁금해졌거든요. 내가 당신에게 입맞춤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호기심이요.”
 “재밌는 호기심이네요.”
 이제야 살짝, 윌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호기심 때문이라고 하면 당신은 다 이해해줄 거 같거든요. 아닌가요?”
 “호기심이라는 단어가 이용당한 거 같군요.”
 윌이 목까지 채웠던 케이프의 단추를 끌렀다. 답답할 정도로 끝까지 여몄던 옷깃이 곡선을 그리며 밑으로 축 처졌다. 루시드는 윌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속내였지만 그 속내가 무엇이든 간에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늘 그랬듯, 이건 루시드 제멋대로 해석해서 내린 결론이니까. 이렇게 되면, 내 세상으로 당신을 끌어들이고 싶어지는데.
 “왜 무너져 내리는 나의 세상 속으로 당신까지 끌어들이고 싶은 걸까요.”
 “제가 답을 해주길 바라는 건가요?”
 “글쎄요. 거기까진 모르겠고, 그렇게 되면 좀 더 보기 좋은 그림일 거 같다는 생각은 해요.”
 악몽만이 반복되어 언제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세상 속에 단 한 명을 초대할 수 있게 해준다면 바로 앞에 이 사람이 그 사람이 되는 건 아닐지. 늘 홀로 미쳐가는 세상 속에 하나가 아닌 둘이라면 꽤나 괜찮은 광경이 나올 것도 같은데.
 “그런 호기심이라면 저도 하나 막 생긴 것 같네요.”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가 당신으로 인해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지.”
 “변하지 않는다, 라는 선택지는 없나요?”
 “이걸로 답을 대신하죠.”
 윌이 우산 손잡이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손잡이를 건네받은 루시드는 상대방을 위해 우산을 좀 더 높게 올려야 했다. 양손이 자유로워진 윌이 어깨에 걸쳤던 케이프를 아예 벗었다.
 “아까부터 떨고 있어서.”
 짧은 설명과 함께 윌이 케이프를 루시드 어깨에 둘렀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케이프를 단단히 여밀 때마다 루시드의 쇄골에 서늘한 감각이 스치듯 남았다. 이건 어떤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일까. 말없이 윌이 하는 모양새를 바라보던 루시드가 우산 손잡이를 넘겨주며 말했다.
 “우산은 필요 없어요. 이 옷은, 세탁해서 돌려드리죠.”



 똑… 똑….
 발밑 카펫으로 옷이 머금었던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루시드가 문을 닫고는 곧장 그 문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케이프를 손끝으로 매만지는 루시드의 표정이 오묘했다. 깊게 삼키고 깊게 내쉬는 호흡마다 방금까지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겹쳐졌다.
 비 오는 날, 무도회장에서.
 무대 위에서의 자유로웠던 춤이.
 예상치 못했던 박수가.
 향수의 향이 코끝을 스치던 가까운 거리가.
 우산 아래에서의 단 둘만의 순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는 박수가 그 사람의 박수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루시드가 손에 든 검정 케이프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
썰 계정에 풀었던 거 글 하나로 엮기.. 새해 첫 글은 윌루시와 함께 

210103 3AM 일부 표현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