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x루시드 / 메이플스토리 / 소설, 상플

[윌루시] Da Capo

 

턱 끝까지 차오르는 호흡이 불안정했다. 몇 번인가 잠깐 몽환 공간에 갇힌 적은 있었다. 하지만 결국 벗어나곤 했었다. 꿈의 지배자, 악몽의 지배자는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출구가 보이지 않는 채로, 꿈 조종자의 수하들에 둘러싸인 채로 침잠해버리는 건 영 기미가 좋지 않았다. 수하들의 기운은 음침했고, 암담한 공간은 점차 루시드를 삼켜가고 있었다.
또 이렇게 갇히기는 싫었는데. 기분 나쁜 수하들의 웃음이 손끝, 발끝부터 등에 이르는 신경까지 점점 옥죄는 것만 같았다. 주저앉은 다리가 저려왔다. 여기서 주저앉아버리면 얼마나 또 긴 시간 속에 고통 받아야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마음을 먹은 대로 따라주질 않았다.
“일어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희가 준비한 악몽을 즐겨주셔야지요.”
수하들의 목소리가 소름끼치도록 루시드의 귓가에 머물렀다. 
  
  
“이것도 악몽인가요?”
익숙한 모습이었다. 회의를 할 때마다 번번이 마주쳤던 동료의 모습. 늘 말끔히 차려 입은 옷과 깔끔히 올린 머리에 한쪽에는 두툼한 책을 늘 끼고 다니던 윌이었다. 옆으로 잠깐 지나갈 때마다 서늘하도록 오묘한 향수 향에 늘 고개를 돌리게 만들던 동료는 몽환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땅에 닿을 듯 말 듯 조금씩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윌을 발견한 수하들의 표정은 장난기 어린 웃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윌이 가까워질수록 수하들은 도망치듯 하나 둘 모습을 감추며 사라질 뿐이었다.
윌이 루시드를 향해 바짝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본 윌의 눈빛은 총기가 사라져 어딘가 풀린 듯 이상했다. 얼굴 곳곳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있었고 하얀 겉옷은 군데군데 피에 젖어있었다.
“여기 어떻게….”
“저기 깨진 공간이 있더군요. 마치 포탈처럼. 당신이 날 초대한 게 아닌가요?”
“나는 초대한 적 없어요.”
윌은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았다. 늘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던 그의 말투는 온데간데없었다. 루시드가 차분히 물었다.
“당신, 지금 굉장히 이상한 거 알아요? 내가 여태껏 봐온 당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네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그분께서 신세계를 보여주실 것 같아요. 이런 기분은 처음이네요. 자유롭고 가벼워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신 차려요.”
윌에게 필요한 말이기도 했지만, 그건 루시드 스스로에게도 필요한 말인 것을 루시드는 잘 알고 있었다. 꿈을 제어 하지 못해 갇혀버린, 악몽의 주인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져버린 자신에게도 필요한 일갈이라는 걸.
윌은 루시드의 말을 잘 듣고 있지 않는 듯 보였다. 휘적휘적 다시 걸음을 옮기는 윌이 루시드로부터 멀어졌다. 늘 끼고 다니던 책이 없는 옆구리가 허전해보였다. 무언가 짚인 듯, 루시드가 윌의 뒷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어디까지 가려는 거죠?”
“무슨 말씀이시죠?”
윌의 눈동자는 순수하게 루시드의 저의를 묻고 있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모습으로 살짝 고개를 갸우뚱 한 윌의 지나친 순수함은 이질적이기에 조금은 섬뜩했다. 
“그쪽으로 계속 가다간 영영 깨어나지 못 해서 죽을 거예요.”
“그건 무섭지 않아요. 그분만 있다면….”
윌의 모습이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졌다. 멍하니 서있던 루시드는 몽환 공간의 주도권이 전처럼 자신에게 넘어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루시드를 가두었던 공간이 점차 소멸하고 있었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었다.
  
  

꿈에서 깰 때마다 피부에 차갑게 와닿는 현실의 느낌은 적응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답답할 정도로 목 끝까지 끌어올렸던 이불을 내린 루시드가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종을 쳤다. 맑은 소리가 공간을 울리는 것도 잠시, 저 멀리 문을 열고 클리너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여기 얼마나 오래 누워 있었지?”
“아주… 오래….”
클리너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루시드가 알겠다며 클리너에게 나갈 것을 명했다. 홀로 남은 방 안은 여전히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창밖에서 불꽃이 터질 때마다 벽지에도 불꽃의 색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샹들리에를 비롯해 온갖 전등과 촛불을 켜놓은 방은 밤을 모르는 낮 같았다. 모든 것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한복판에서 생각을 정리한 루시드가 침대를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흘러간 꿈이라지만 분명 범상치 않은 꿈이었다. 확인해 볼 게 있었다.
  
  
  

몇 번인가 주군을 알현하기 위해 지나갔던 길이었다. 하지만 평상시와는 다르게 에스페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미 폭풍우가 한바탕 쓸고 간 것처럼 잠잠했는데, 오히려 이러한 분위기가 피부로 서늘하게 전해졌다.
물 위에 놓여있는 난파선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난파선을 기점으로 사람 몇몇이 머물렀던 것인지 그 흔적이 어수선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난파선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하얀 테두리의 거울은 썩 주변과 어울리지 않았다. 거울을 향해 손을 뻗자 마치 물속을 향해 손을 뻗은 것처럼 찬 기운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거울 안의 신전을 향해 루시드가 발을 옮겼다.
정처 없이 떠도는 몬스터들과 루시드만이 고요한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전부였다. 길게 난 신전의 복도를 말없이 걷던 루시드가 웅장한 빛의 신좌 앞의 거울에 멈춰 섰다. 과연 이것을 거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루시드는 궁금했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만을 보여줘야 하잖아요. 당신의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조차 못 하네요.”
루시드의 목소리가 신전 안에 울렸다. 평상시 같았으면 가볍게 거울을 두드리거나 인기척을 내면 윌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몽환 공간에서 보았던 윌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디 가서 거울이라고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조심스럽게 루시드가 거울 속을 살폈다. 조금은 뒤틀리고 왜곡된 루시드의 모습이 나타나던 거울이 루시드의 목소리에 반응을 한 것인지 루시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 거울 안쪽으로 처음 보는 공간의 모습이 나타났다. 거울처럼 생겼지만 결코 거울이라고 할 수 없는, 에스페라의 거울을 포탈처럼 타는 것은 조금은 불쾌한 일이었지만, 루시드는 주저하지 않고 거울 안쪽으로 들어갔다.

발이 푹푹 빠졌다. 바닷물이 흘러들어 온 건가 싶어 자세히 보니, 물보다 조금은 걸쭉한 은빛 액체가 발목부근에서 찰박이고 있었다. 거울이 녹아내리는 모양이었다. 광활한 공간을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저 멀리 무언가가 녹아내린 거울의 한복판에 누워있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 봐요. 윌!”
옷이며 얼굴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꿈에서 본 모습보다 더 처참했다. 눈을 감은 채로 액체가 만드는 흐름에 힘없이 흔들리는 윌은 의식이 없었다. 목 부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지만, 잡히는 맥은 형편없었다. 잠시 윌의 곁에 있었을 뿐인데도 루시드의 검정 치마에도 검붉은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둔 채로 의식 찾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분명 지금 이 공간은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거울 안에서 쓸 수 있는 힘은 한정적이었기에, 무언가 조치를 취하려면 루시드는 윌을 데리고 거울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겨우 거울 밖으로 윌을 끌어낸 루시드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옷이 엉망이었다. 언제 긁혔는지 루시드의 손등에도 사선으로 상처가 나 있었다. 윌이 홀로 머무는 곳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랐기에 루시드가 갈 수 있는 곳은 한 곳 뿐이었다. 슬픔도 괴로움도 없는 꿈의 도시, 레헬른. 루시드는 일단 윌을 레헬른에 데려간 후 다음 일을 생각해볼 참이었다.
  
  

빛 하나 들어올 틈 없이 창문이란 창문 모두에 암막 커튼을 쳤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레헬른 한복판에서 루시드가 환자에게 안정을 줄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미친 듯이 울려 퍼지는 공해와 다를 바 없을 파티 음악으로부터, 모든 골목이 화약 냄새로 가득할 정도로 끝없이 하늘에서 터지는 폭죽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불꽃들로부터 조금이라도 고립시키기 위해 루시드는 열심히 커튼을 치고 있었다. 산 이후로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지 루시드가 가볍게 손목으로 움직임을 만들 때마다 커튼이 풀썩이며 먼지를 뱉었다.
커튼을 사고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커튼을 치면 생기는 어둠이 너무나도 싫었으니까. 홀로 방안에 있을 때마다 스며드는 암흑이 싫었다. 고요를 넘어 무서울 정도로 심장을 그러쥐는, 어둠과 늘 함께 오는 적막이 싫었다. 그래서 늘 잠을 잘 때는 방에 조명이란 조명은 다 켜야지만 잘 수 있었다. 레헬른 거리에서 파티가 없는 시간이라면 방 안의 전축을 켜서 무슨 음악이라도 귀에 끊임없이 들리게 해야만 했다.
눈앞에 적막한 어둠이 스며들 때마다 눈을 감은 채로 얼음에 갇혔던 어린 시절이, 때때로 갇히곤 했던 악몽의 한 구석이, 검은 마법사가 그리고 있던 세계가 떠올랐다. 밀려오는 기억들이 공포로 돌아오는 게 루시드는 싫었다.
그칠 줄 모르고 흐르던 피가 시트 위에 덕지덕지 붙어 말라가고 있었다. 루시드는 클리너를 부려 침대 시트를 갈게 하고 새 물수건을 준비해 지저분한 윌의 얼굴을 말끔히 닦게 했다. 약은 조금 전에 먹였으니 몇 시간 후에 먹이면 될 일이였다.
왜 이렇게 이 사람을 살리고 싶은 걸까. 문득 그냥 두고 올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데려온 걸까 의문이 들었다. 여기까지 데려올 것도 없이 무너져가는 거울 세계의 신전에서 빼내주는 것까지만 해줘도 됐을 것 같은데. 그저 꿈속에서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 구해주는 이 없이 죽어가는 동료에 대한 안타까움? 엉킨 실타래처럼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은 쉬이 답을 내리지 못했다. 루시드는 방을 나서며 클리너를 불러 자신이 입을 깨끗한 옷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았다. 분명 대적자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들은 꿈인 것처럼 어디 하나 선명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린 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처가 터졌는지 윌이 윽, 소리와 함께 멈췄다. 복부 부분에 생긴 검붉은 원의 면적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손으로 부여잡자 축축한 감각이 손바닥 가득 그대로 전해졌다. 어두워서 앞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안경이 필요했다. 윌이 손으로 침대 옆 협탁을 더듬자 무엇을 건드렸는지 불이 켜지며 주변이 밝아졌고 곧 익숙한 물건이 손에 잡혔다. 집어든 안경다리 한쪽이 나사가 빠져 헐거웠다. 안경을 쓰고 주변을 살피자 윌의 두 눈에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언젠가 하류의 에스페라에 가기 위해 며칠인가 묵었던 레헬른 시계탑 안의 방의 모습이 분명했다. 안경을 찾다가 어쩌다가 켰을 협탁 위 작은 전등이 금방이라도 고장 날 듯 깜빡거렸다.
윌이 침대 밖으로 겨우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발치에 놓인 대야가 발에 치였다. 대야 안엔 윌에게 묻은 피를 닦았을 물수건이 담겨 흔들리고 있었다.
  
  

계단으로 내려가려는데 저 멀리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홀로 찬 계단에 멍하니 앉아있는 루시드를 발견한 윌이 조심스럽게 루시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기척에 잠깐 고개를 돌린 루시드가 윌임을 확인하고는 도로 고개를 돌렸다.
“별로 기뻐하지 않네요. 당신이 공들여서 살려놓은 사람 하나가 이렇게 살아서 걸어오는데.”
“축제라도 해드려야 할까요? 당신의 이름을 걸고 파티라도 해드리면 성에 차실까요?”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나의 세계는 충분히, 충분히 어지럽고 복잡하고 엉망이에요.”
“….”
“거기에 당신까지 끼워 넣기에는 많이 버겁네요.”
“그렇습니까.”
“당장이라도 내가 머무는 이 레헬른을 당신이 떠나주길 바라지만, 환자에게 베푸는 마지막 아량으로 오늘은 여기서 그만하겠어요.”
“그쪽 뜻이 정 그러하다면… 알겠습니다. 어쨌든 고맙습니다.”
윌이 루시드 옆에 앉는데 평상시라면 났을 서늘한 향수의 향 대신 피비린내가 훅 밀려들어왔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루시드는 윌이 무엇을 물을지 예상이 갔다. 윌이 묻기도 전에 루시드가 먼저 선수를 쳤다.
“왜 살렸냐구요? 복잡하게 설명할 거 없이 동료애라고 해두죠. 당신이 죽으면 내가 수행해야 될 명령이 더 많아질 테니까.”
“….”
“하나 더 말해주자면 당신이 날 먼저 구했으니까요. 내가 당신을 구하기 전에.”
“제가… 그랬습니까.”
“당신이 오지 않았다면 난 아직도 거기에 갇혀있겠죠. 절망에 빠진 채로, 영원히.”
“서로 한 번씩 목숨을 빚졌군요.”
윌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루시드의 표정은 담담했다.
“나를 구해주었을 지라도 당신이 나의 악몽이었던 건 변하지 않아요. 초대하지 않은 ‘동료’가 제 꿈을 헤집고 다닌 건 충분히 불편하니까요.”
“그거 좋네요. 나는 당신의 악몽이 되고, 당신은 나의 거짓이 되고.”
“거짓이라. 당신의 거짓이라….”
“…크게 의미를 담을 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제가 해결해야할 문제니까요.”
“악몽과 거짓의 만남이라니 어디 하나 정상적인 구석이 없는 만남이네요.”
루시드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윌은 놀랄 것 없다는 듯 답했다.
“애초부터, 군단장이 된 것부터 그러했지요. 세상이 정해둔 선(善)의 길을 벗어나, 하늘같은 이상을 쫒고 기꺼이 충성을 바치는 것은 분명 세상이 요구하는 옳은 일이 아니니까요.”
“충성… 옳은 일….”
루시드가 윌이 말했던 단어를 곱씹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다 무언가가 생각난 듯 말했다.
“듣자하니 당신이 대적자한테 철저히 패배하고 도망가다가 실패한 모양이던데.”
“도망이란 단어를 당신이 운운할 처지는 아닐 거 같은데요, 루시드.”
“당신 과거의 행적이라면 차원의 도서관에나 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지우고 도망치고, 패배하고 도망치고. 도망치는 게 한 두 번이 아니네요.”
루시드의 말이 조금은 불쾌한 듯 윌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당신도 마찬가지죠. 당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기억을 다 지우고 도망쳤잖아요. 에우렐의 그 누가 당신을 기억하겠습니까.”
“누가 더 한심한가 대결하자는 건가요?”
“아뇨. 사실은 분명히 하자는 겁니다.”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루시드.”
“무슨 말을 더 듣고 싶은 거죠?”
“책 말입니다. 저를 구조할 때 주변에 책은 없었는지요?”
루시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당신이 누워있던 곳 주변에는 없었어요. 제가 가기 전에 책을 잃어버렸던 것이겠죠. 어디에 흘렸던지, 아니면 누가 가져갔던지.”
“….”
“설마 책이 있어야만 싸울 수 있나요? 군단장의 브레인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이 책이 있어야만 싸울 수 있다니.”
루시드의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윌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짧게 쓴웃음을 지은 윌이 사늘하게 답했다.
“그것보다는… 잃어버려서 좋을 게 없죠. 저만 읽을 수 있는 암어로 적힌 책일지라도, 그건 위대하신 그분의 전략 일부가 담긴 책이기도 하니까요.”
다시 몸을 일으킨 윌이 방으로 돌아가려는 와중에 루시드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하루종일 축제를 연다고 한 들 그 분의 뜻을 바꿀 수 있을까요? 크고 원대해 그 뜻조차 헤아리기 힘든 위대하신 그분의 뜻을 말입니다.”
“그분이 말씀해주신 적이 있나요?”
“기꺼이 그래주셨지요. 목숨보다 가치 있는 것을 보여주실 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주 평화롭네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루시드가 뒤를 돌아 윌을 마주보았다.
“무엇보다도 제가 기다리는 순간이니까요.”
“아무 것도 없는, 그분조차 없는 그 세계를… 기다린다구요?”
“평범한 세계가 아니죠. 새로운, 신세계지요.”
“그게 무슨 뜻인지 정녕 알고 그러는 건가요?”
“아무 것도 없는 신세계. 저에겐 아무 것도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신세계’인 것이 중요하죠. 그게 존재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이 두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아무 것도 없는 것 따위… 내가 그곳에 없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몽환 공간에서 죽는 게 무섭지 않다고 그랬군요. 그 말이 진심이었어.”
“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제가 하고도 남을 말이네요.”
“당신, 미쳤다는 말 들어본 적 없나요?”
무엇보다도 순수한 윌의 욕망은 조금 섬뜩하기까지 했다. 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지요. 미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그래서 누군가는 미쳤다고 할 것을 ‘선택’한 거구요. 이런 쓸데없는 축제의 마을이니 뭐니- 의미 없을 겁니다. 그분이 이룩하실 신세계에 비하면… 그러니 그분의 마음은 돌릴 수 없을 겁니다.”
윌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루시드가 소식이 있다며 말했다. 윌이 아파서 누워있던 사이 대적자가 결국 리멘에 진입했다고.
“결국 리멘에 진입했군요.”
“그분의 손에 잠들 테죠.”
루시드가 담담히 말했다.
“그럼 이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되겠네요. 저는 그분의 곁으로 돌아가 성치 않은 몸이지만 도울 겁니다.”
“잘 됐네요.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해요. 난 내가 해야만 할 일을 찾아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루시드가 몸을 일으켰다. 루시드가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고 계단 밑으로 내려가려는데 윌이 정중히 말했다.
“고맙습니다.”
“….”
“이렇게 살려줘서.”
“….”
“이렇게 살려주니까 말싸움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루시드가 윌의 말을 듣고 생각하더니 몸을 돌려 말했다.
“고마워요.”
“…….”
“날 그 때 구해줘서.”









첫 업로드 날짜 2019.05.26.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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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마법사 이후의 악역의 최후라면.. 윌은 미쳐버리고 루시드는 영원히 갇혀버릴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은 이 소설의 뒷부분 이후에 나올 수 있겠죠. 아마 올해 안으로 쓰게 될 거 같습니다. 언젠가 호흡이 긴 소설로 내고 싶은 조합이자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윌이랑 루시드 완전 거미와 나비 조합이라 환상의 커플인데 같이 파실 분 구합니다. (1/n)

16주년 기념 공모전에 제출했던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