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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석류] 조금은 오래도록 - 1

르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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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석류] 조금은 오래도록 - 1

◆  “그분을 위해!”  분명 전투 중이었다. 익숙하게 주술을 쓰며 전열을 살폈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잘 진행되려는 찰나였다. 그때, 상대편에서 들려온 단 한 마디의 말과 함께 온 세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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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을 위해!”
 분명 전투 중이었다. 익숙하게 주술을 쓰며 전열을 살폈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잘 진행되려는 찰나였다. 그때, 상대편에서 들려온 단 한 마디의 말과 함께 온 세상의 시간은 멈췄고, 시야는 온통 암흑으로 변했다.
 “목 마르다고!”

 분명 전투 중이었는데….

 

 



 그때 아무 말도 얹지 말 걸. 에스프레소 맛 쿠키가 하는 말을 들을 걸. 괜히 고집을 부려서…. 맨 뒤를 알 수 없는 게 불안하다고, 조금은 안전하게 가자는 말을 들을 걸.
 감초맛 쿠키가 애꿎은 자신의 머리만 쾅쾅 쳤다. 석류맛 쿠키의 병상 옆에 가져다둔 작은 나무 의자에 오늘도 하루 종일 앉아있었지만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석류맛 쿠키는 여전히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니까. 침대 가장자리에 펼쳐놓은 노트엔 며칠간 내용에 진전이 없었다. 늘상 가지고 다니면서 사소한 것도 종종 적던 노트였지만, 석류맛 쿠키의 상태가 나빠진 이후로 습관적으로 적던 것을 그만 두니 적을 게 없다는 표현이 어쩌면 맞을지도 몰랐다. 신경은 온통 석류맛 쿠키의 상태에 쏠려있었지만 적을 수 있는 문장은 하나 뿐이었다. 석류맛 쿠키는 여전히 아프다.
 며칠 새 소리 없는 자책만이 늘었다. 그때의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잠자코 있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계획한 대로 스킬을 쓰고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아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사단이 난 후였다. 대열은 무너지고 있었고 상대방의 공격에 슬슬 힘이 부치고 있었지만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 그 자리는 벗어날 수 없었다. 허브맛 쿠키가 힘을 썼지만 그것은 이미 쓰러진 석류맛 쿠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달려갔지만, 석류맛 쿠키를 아무리 흔들어봐도 대답이 없었다. 석류맛 쿠키를 붙잡은 손도 붉은 자국으로 범벅이었다. 방금 전투에서 자신도 부상을 당했지만, 그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앞뒤를 잴 것도 없이 상처 부위를 틀어막고 석류맛 쿠키를 들쳐업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직진했다. 뜀박질에 가까운 걸음을 할 때마다 다리가 터질 듯이 아팠지만 쉴 수 없었다. 어떤 정신으로 왕국에 돌아온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석류맛 쿠키의 이름을 수십 번이고 불렀고,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초조하고 불안했던 어떠한 감정만이 기억날 뿐. 마음만 앞서서 자칫 넘어질까봐 몇 번이고 손에 든 낫의 손잡이 끝을 땅에 박아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석류맛 쿠키의 축 처진 팔은 저항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왕국으로 돌아와 병상에 눕힐 때까지 석류맛 쿠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병상 머리맡에 다리가 풀려 무너지듯 무릎으로 주저앉고도 넋이 나간 쿠키처럼 이름을 불렀다. 그런 감초맛 쿠키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린 건 에스프레소 맛 쿠키였다. 일단 옷을 갈아입고 오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석류맛 쿠키가 고개를 기댔던 어깨 부근이 온통 축축하게 물들어있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의무실 문을 열자 문 앞에 쪼르르 모여있던 어린 쿠키들이 감초맛 쿠키를 올려다봤다. 왕국으로 귀환하던 쿠키들이 한바탕 시끄러워서 호기심에 모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감초맛 쿠키의 모습을 본 어린 쿠키들은 하나 같이 소리를 지르며 저 멀리 각각 흩어졌다. 아직 닦아내지 못 해 피부에 그대로 남아있는 붉은 흔적과, 어깨선을 따라 등까지 옷 위로 넓게 퍼진 자국은 어린 쿠키들이 기대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짙은 색 옷에 밴 자국은 빨갛다기보다는 검붉은 쪽에 가까웠지만, 어느 쪽이든 어린 쿠키들이 보기에 둘 다 무서운 모습임에는 분명했다.



 며칠 동안 의무실에 자리를 비운 시간이 더 적었다. 어쩌면 들락날락이라는 표현보다는 그곳에 살다시피 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정도로. 할당된 일을 끝내면 의무실로 돌아와 석류맛 쿠키의 상태를 살피는 게 무엇보다도 우선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병상 옆 의자엔 늘 감초맛 쿠키가 앉아있었다.
 잠깐이라도 선잠에 들면 별별 꿈을 꿨는데, 꼭 꿈의 마지막은 쓰러진 석류맛 쿠키로 끝났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때 그곳. 축 늘어진 붉게 물든 손과 초점 잃은 눈동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면 단 둘만 남은 의무실로 돌아오지만,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이 안정을 찾기 위해선 늘 시간이 필요했다.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얼굴과, 차디찬 손. 늘어날지언정 줄지 않는 각종 처방은 조금이라도 희망을 기대하는 감초맛 쿠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상태가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의식은 쉽게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건 후회다. 그렇다면 집착이기도 한가? 어쩌면 의미 없는 희망 고문? 그저 과한 걱정?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은 자책으로 끝났다.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자책에 스멀스멀 먹혀가는 것만 같았다.
 왕국의 쿠키들은 요 며칠 새 감초맛 쿠키의 말수가 지나치게 줄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걱정을 했고, 누군가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평상시 같았으면 한 마디라도 더 대꾸를 해줬을 테지만, 감초맛 쿠키는 입을 떼지 않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석류맛 쿠키가 쓰러진지 4일째 되던 날, 감초맛 쿠키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침대 주변 이곳저곳을 살폈다. 뭔가가 허전했다. 그러다가 문득, 석류맛 쿠키가 들고 다니던 거울과 방울이 떠올랐다. 전투에 나설 때 들고 있었으니 분명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떨어뜨리고 왔을 텐데. 모두가 정신이 없어서 아무도 따로 챙겨둘 생각을 못 했지만, 석류맛 쿠키가 깨어나면 그것들을 제일 먼저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다시 그곳에 가서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수습해왔다. 붉은 자국이 덕지덕지 붙어 흙먼지를 뒤집어쓴 두 물건을 주워들어, 입고 있던 옷으로 대강 닦아 봤지만 얼룩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석류맛 쿠키 옆에 앉아 몇 번이고 거울과 방울을 헝겊으로 정성스럽게 닦았다. 지저분한 흔적을 지워내고도 몇 번이고 닦고 또 닦았다. 거울은 흠집 하나 없이 광이 났고, 방울은 전처럼 맑은 소리를 찾았지만, 손때 묻은 두 물건의 주인은 여태 눈을 뜨지 못 했다. 병상 옆 협탁에 놓인 전등 아래 거울과 방울을 가지런히 올려 놓은 감초맛 쿠키가 몇 번이고 배치를 다시 했다. 위 아래로 나란히도 뒀다가, 서로 겹쳐서도 놨다가, 일(一)자로도 뒀다가. 어떻게 두든 마음에 차지 않은 석류맛 쿠키가 뭐라고 할 장면이 훤했다. 어떤 날카로운 지적이 날아들어도 좋았다. 그저 깨어나 주기만 한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불쑥 이마 위에 생겨난 차가운 무게감에 정신이 들었다. 눈을 감아서 볼 수는 없었지만 무게감의 정체는 곧장 따라온 음성으로 알 수 있었다.
 “열은 떨어진 것 같은데….”
 손바닥으로 한 번, 손등으로 한 번. 이마에 내려앉은 감초맛 쿠키의 손은 이내 서늘한 기운만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원래 이렇게 손이 찼던가. 의외의 감촉이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무슨 일이냐며 손대지 말라며 뿌리쳤을 텐데. 물론 평상시라면 애초에 감초맛 쿠키가 손댈 일은 없었겠지만. 석류맛 쿠키는 말을 할 기력은커녕 눈꺼풀을 뜰 힘조차 없어서 묵묵히 누워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목 끝까지 다시 이불이 덮이고 꿍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점점 멀어져갔다. 눈만 감고 깨어 있으려고 다짐했던 것도 잠시, 또다시 의식은 깊은 어둠 속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꿈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의식적인 회상인지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인지 알 수 없는 잔상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분명 전투 중이었는데….

 전투에 나서기 전 상대방 진영을 예측하면서도 불길하더라니. 맨 끝에 서서 와인 잔을 여유롭게 흔들고 있는 적을 확인하자마자 불길함은 확신이 됐다. 곧장 이쪽으로 공격이 들어와서 내가 제일 먼저 쓰러지게 되리라는.
 공격을 받아 목 부분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것까지는 확실히 기억이 났다. 상처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쓰러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거울과 방울을 떨어뜨린 것도 얼추 기억이 났다. 나뒹구는 것들을 잡으려고 손을 뻗은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선명하지 않았다. 머리 위로 오가는 아군들의 정신없는 외침과 아수라장이 되어가는 전장의 장면이- 몇 번이고 반복된 혼몽 중에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의 장면인지, 아니면 언뜻 본 것인지. 양팔이 들어 올려져 누군가의 등에 업힌 건 꿈이 아니었던 것도 같고. 와중에 드문드문 음성이 떠올랐다.
 “빨리 옮겨야 될 거 아니야! 이러다 죽는다고! 야, 정신 좀 차려 봐.”
 뻔했다. 감초맛 쿠키가 내지른 소리였을 테지.
 목만 다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오른쪽 무릎부터 발끝까지 간헐적으로 고통이 전해졌다. 대열이 무너지면서 다리도 같이 부러졌던 걸까. 의식이 선명해질수록 고통도 선명해지고 있었다. 어디가 다쳤는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몸 곳곳에서 서로 자기들이 다쳤다며 마치 온 왕국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았으니까. 다시 잠에 들면 덜 아플까 싶다가도, 잠이 들기엔 너무나도 아팠다.
 아픔에 몸부림치며 겨우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오는 내부가 차차 선명해졌다. 의무실로 쓰고 있는 쿠키 하우스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니 전투 당시에 입고 나갔던 붉은색 옷이 걸려있었다. 상처가 난 자리에서 쏟아졌을 흔적이 덕지덕지 말라 붙어 있었고 몇몇 부분은 찢어진 건지 영 성한 구석 없이 엉망진창이었다.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보니 살짝 결리긴 했지만 손은 멀쩡했다. 못 보던 하얀 옷소매가 보였다. 아픈 쿠키들만 입는 옷인 걸까. 베개에 닿은 머리가 편안한 것을 보아 전투 때 묶고 나갔던 머리도 아예 풀려있는 모양이었다.
 “석류맛 쿠키이- 일어난 거야?”
 가까운 곳에서 독버섯맛 쿠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팔을 움직이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반응을 한 모양이었다.
 “깼다고?”
 침대 위에 난 창문 바깥에서 감초맛 쿠키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우당탕 문이 열렸다. 갑작스레 열린 문과 함께 들어온 볕 때문에 눈이 부셔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곧장 입구에서 침대까지 달려오는 쿠키는 감초맛 쿠키가 분명했다.
 “괜찮아? 여기 어딘지 알겠어? 우리는 누군지 알아보겠고?”
 감초맛 쿠키의 질문이 쉴 틈 없이 날아들었다. 석류맛 쿠키가 입을 뗐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목으로 손을 갖다 댔다. 독버섯맛 쿠키가 불쑥 들고 있던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내밀었다. 스케치북 한 면이 온통 버섯 그림으로 알록달록했다. 크레파스를 받아든 석류맛 쿠키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글씨를 적었다. 평상시와 다른 삐뚤빼뚤 엉망인 글씨체로 스케치북 위에 짧은 문장이 적혔다.
 「갈증이 나요.
 “목이 말라?”
 독버섯맛 쿠키가 석류맛 쿠키가 적은 글을 보며 중얼거렸다. 기다려보라는 말과 함께 감초맛 쿠키가 어디선가 반을 조금 넘게 채운 컵을 가져왔다. 감초맛 쿠키가 버튼을 조작하자 평각을 이루던 병상이 점차 직각에 가까운 둔각으로 바뀌었다. 일으켜 세워진 석류맛 쿠키는 몸이 편치 않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 감초맛 쿠키가 입가에 컵을 가져다 주자 석류맛 쿠키는 살짝 입을 댔다가 뗐다.
 그래 가지곤 입술이나 겨우 적실 텐데. 마시는 게 시원치 않자 감초맛 쿠키가 한 번 더 권했지만 석류맛 쿠키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양했다.
 “다른 거 더 가져다줄까? 먹을 거?”
 석류맛 쿠키가 또 한 번 고개를 내젓고는 손에 쥐고 있던 크레파스를 독버섯맛 쿠키에게 내밀었다. 크레파스를 받아든 독버섯맛 쿠키가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먹어야 되는데. 안 먹으면 힘이 안 나.”
 힘없이 허공을 둘러보던 석류맛 쿠키의 시선이 감초맛 쿠키를 향했다. 하얗고 긴 속눈썹이 그리는 그림자가 어느 때보다도 짙었다.
 “다시 눕혀줘?”
 감초맛 쿠키가 묻자 석류맛 쿠키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감초맛 쿠키가 병상을 조절해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자 원래처럼 누운 석류맛 쿠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후 아무런 미동이 없자 감초맛 쿠키는 조심스럽게 석류맛 쿠키를 불렀다.
 “석류맛 쿠키.”
 독버섯맛 쿠키가 이어 물었다.
 “또 아픈 거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불현듯 이는 불안함에 감초맛 쿠키가 몸을 숙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살짝 돌려 석류맛 쿠키의 얼굴 가까이에 귀를 가져다 댔다.
 다행히도 규칙적인 호흡이 들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감초맛 쿠키가 독버섯맛 쿠키를 향해 말했다.
 “자나 봐.”
 “그럼 조용히 해야지이.”
 독버섯맛 쿠키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품에 챙기며 조용히 나갈 채비를 했다. 감초맛 쿠키가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적막이 찾아온 의무실에서 감초맛 쿠키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 


 「오늘로 8일째….
 펜을 쥐고 있던 손이 멈췄다. 쓰던 것을 멈춘 감초맛 쿠키가 고개를 들어 석류맛 쿠키를 바라보았다. 침대 옆 협탁 위의 전등의 빛이 은은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어제 잠깐 깼다가 잠든 후로 석류맛 쿠키는 계속 잠만 잤다. 그 잠깐 사이에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치료하면서 내내 잠만 잘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말을 못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 허공에 멍하니 떠있는 펜촉은 펼쳐놓은 노트 위에도 내려앉지 못한 채 갈 곳을 찾지 못 하고 있었다. 고집 부리지 말 걸… 그러지 말 걸…. 쓰던 것을 멈추고, 석류맛 쿠키의 상태를 확인하고, 밀려오는 후회에 자책하는 게 대체 몇 번 째인건지.
 난 고작 손에 붕대를 감는 걸로 끝났는데. 같이 전투에 나갔던 나머지 셋도 약만 바르고 잘만 돌아다니는데. 왜 혼자서만 그렇게 누워있는 거냐고 속으로 괜히 따지고 투정도 부려보았다. 정작 따져야 할 건 석류맛 쿠키가 아닌 고집을 부린 자기 자신임을 알면서도.
 꽤 오랜 시간 석류맛 쿠키를 저주하는 마음으로 쓴 것들이 노트를 채워왔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말 이렇게 크게 아프거나 죽길 바라면서 쓴 것은 아니었다. 하루에 몇 번이고 듣는 잔소리와 지적에 싫증이 나서 툴툴거리듯 쓴 내용이 태반이었는데. 그렇게 적어 내려간 것들이 이번 석류맛 쿠키의 부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있는 것이라면, 저주가 효과를 발한 것이라면 다시 거두고 싶었다. 저주를 내린 쿠키가 돌려받아야 한다면 응당 그러겠다고, 절대 이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써내려 간 게 아니었으니 제발 살려만 달라고…. 이렇게 간절하게 무언가를 바란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속으로 얼마나 빌었던가.
 오늘도 진전 없는 노트를 앞에 두고 밤이 지나고 있었다. 어제는 눈을 떴으니 이젠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지만 그래도 속이 타는 것은 여전했다. 톡톡, 애꿎은 노트의 빈 페이지만 펜촉으로 두들기던 감초맛 쿠키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이… 몇 시죠?”
 “뭐?”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번쩍 고개를 든 감초맛 쿠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8일만에 듣게 된 목소리였다. 평상시보다 잠긴 목소리었지만, 반가운 목소리. 아예 못 듣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그 목소리.
 석류맛 쿠키가 차분한 시선으로 감초맛 쿠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깜빡이고 있는 눈을 이렇게 마주한 게 이렇게 반갑다니.
 평상시에 석류맛 쿠키 앞에서라면 숨기고 덮기 바빴을 노트를 덮을 생각도 못 한 채, 감초맛 쿠키는 석류맛 쿠키를 마주봤다. 이 감정은 어떤 감정이 더 앞서고 있는 걸까.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기쁘며 안도하게 되는 이 감정은.
감초맛 쿠키가 몸을 일으켜 천천히 석류맛 쿠키가 누운 머리맡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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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올렸던 거에 비해 수정한 부분이 많아서 재업.

처음 쓰고 싶었던 씬 전에 회상씬으로 넣으려던 걸 아예 따로 뺀 후에 뺀 것만 한 편으로 끝낼랬는데 자꾸 길어져서.. 여러 편으로 쪼개게 되었습니다. 지금 1편 자체로도 분량은 긴 편이 아닌데 왜 이렇게 글을 쓰는 게 쉽지만은 않은 건지. 그럼에도 쓰게 되었습니다. 감석이 제가 글을 쓰게 만드네요. 
아레나에서 항상 석류와 허브를 뱀파로 따고 다니는 사람으로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얘들아 미안해.. 목~ 마르다고!!!!